어제는 입춘이었다. 오늘은 입춘이 지난 하루다. 입춘추위가 무색할 만큼 설이 지난 후 포근한 날이 이어졌다. 비 올 듯이 흐리긴 했지만 암튼 봄은 온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는 ‘소군원(昭君怨)’이란 시에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소군(昭君)의 심정을 읊었다.
중국의 4대 미녀(양귀비, 서시, 초선, 왕소군) 중 한사람인 왕소군은 전한 시대 원조 때의 궁녀다. 왕소군이 켜는 비파소리에 날아가던 기러기가 나래짓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낙안(落雁)’이라 부르기도 했다.
소군의 회한은 흉노(匈奴) 왕(王)에게 시집을 가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한(漢)나라 원제(元帝)는 걸핏하면 쳐내려오는 흉노족을 달래기 위해 흉노 왕에게 반반한 궁녀 하나를 주기로 했다. 누구를 보낼 것인가 생각하다가 원제는 궁녀들의 초상화집에서 가장 못생긴 왕소군을 찍었다.
원제(元帝)는 궁중화가 모연수(毛延壽)에게 명하여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놓게 했는데 궁녀들은 황제의 사랑을 받기 위해 다투어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며 제 얼굴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졸라댔다. 하지만 왕소군은 모연수를 찾지 않았다. 자신의 미모에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모연수는 왕소군을 가장 못생기게 그려 바친 것이다.
오랑캐 땅으로 떠나는 왕소군의 실물을 본 원제는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훗날 가련한 왕소군의 심정을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시로 남겼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자연히 옷 띠가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이는 허리몸매를 위함이 아니었도다

시 속에 담겨진 춘래불사춘의 의미는 회한이 깊다. 요즘에 딱 어울리는 구절이다.
아직 강에는 얼음이 두껍고 바람은 차다. 뭐하나 나아진 게 없다. 그 밥에 그 나물. 아직 봄이라 하기엔 이르다.
그래도 봄은 준비하는 자의 몫이라 하지 않은가?
정골을 들어가기 전에 두촌면사무소에 들렀다.
흑둔지(자은1리) 두촌면사무소 입구 오른쪽에는 아름드리 측백나무가 서있고 왼쪽 등나무 덩굴 아래에는 군수 김시명의 송덕비가 있다.
측백나무는 어림잡아 백년은 넘어 보인다. 그 옆에 정자가 있고 정자 옆에 최영재 의사 송덕비가 서있다.
최영재는 1923년 5월25일 평안북도 운산면 북진면 진동마을에서 태어났다. 두 달 만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궁핍한 형편 가운데 고학으로 학업을 닦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뜻을 세웠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전장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는 등 의술을 베풀었으며, 졸업 후에는 홍천 두촌면에 정착하여 제이드 병원을 운영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 이에 그의 덕행을 기리고자 면민들이 뜻을 모아 1990년 5월25일 송덕비를 세웠다.
최영재 의사가 의술을 베풀던 제이드병원을 찾아 나섰다.
범바위 앞 다리를 건너 ‘정골’로 들어섰다. 길은 네 갈래로 갈라진다. 맨 왼쪽으로 올라서면 강둑을 따라 ‘욕개골’로 오르게 되고 그 옆 샛길로 들어서면 둔덕으로 오르는 ‘준영골’이다. 준영골 길 어귀에는 커다란 콘크리트 기둥이 하나는 서있고 또 다른 하나는 쓰러져 있다. 잣나무와 밤나무가 그늘을 지으며 바람에 몸을 흔들고 서있는 그 안쪽으로 오래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제이드병원’이었다. 선교와 대민 진료 봉사활동을 펼치기 위해 ‘이승만(자은2리 노인회장)’씨가 땅을 희사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이후 3군단의 지원을 받아 선교사 ‘마두원’씨가 이 집을 짓고 선교활동을 하면서 최영재 의사도 함께 두촌에 정착하게 된다. 그 후 선교사 ‘후렌 박사’가 뒤를 이어 성경학교를 열고 선교 활동을 했다.
이 무렵 최영재 의사가 이 건물에 병원을 차리고 의술을 베풀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료로 진료를 해주고 한밤중에도 병원 문을 두드리는 환자를 극진히 돌보아 주었다고 한다. 두촌면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에서도 이 병원의 혜택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술을 베풀었다.
면사무소에 세워진 최영재 의사 송덕비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세워졌으며 그 후 세상을 떠났을 때는 긴 애도의 행렬이 이어졌다고 한다.
정골은 자은2리이다. ‘나가정마을’, ‘정골’, ‘감푸래미’, ‘쉰재계곡’을 아우르는 마을이다. 두촌중학교가 있고 마을입구에 마을회관과 경로당이 있다.
마을을 들어서면서 눈에 보이는대로 스케치를 한 뒤 경로당으로 들어섰다. 마을의 노인 회장을 비롯한 여러분이 모여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설날행사와 정월 대보름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설날에 대한 생각을 다시 새겨본다.
설날은 한 집안의 행사이기도 하지만 마을의 결속을 다지는 큰 행사다. 마을을 떠나 타관살이를 하다가 명절이라고 찾아 고향을 찾아 돌아오는 일가친척들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고향의 산과 들이 있고, 그 속에 변치않고 따뜻이 맞아주는 흙냄새와 바람이 있기에 고향이란 말만 떠올려도 가슴이 저려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을 맞이하는 마을사람들의 마음 또한 넉넉하고 푸근하다.
설이란 서로 낯설지 않게 서로를 감싸주는 소통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설은 세뱃돈 받는 날로 기억하지만 설에 담긴 뜻은 참으로 심오하다.
설은 한해가 시작되는 첫날 음력 1월1일이 설날이다. 설이라는 말은 ‘사린다’, ‘사간다’에서 온 말로 조심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 ‘섧다’는 말로 슬프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설이란 그저 기쁜 날이라기보다 한 해가 시작된다는 뜻에서 모든 일에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는 매우 뜻깊은 명절로 여겨왔다.
또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이라고도 하는데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설날’ 노래(윤극영 작사 작곡)가 있기 전에는 까치설이 없었다 한다.
옛날에는 작은설을 가리켜 ‘아치설’, ‘아찬설’이라고 했다. ‘아치’는 ‘작은(小)’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아치설의 ‘아치’의 뜻을 상실하면서 ‘아치’와 음이 비슷한 ‘까치’로 엉뚱하게 바뀌었다고 한다. 이것의 근거는 음력으로 22일 조금을 남서 다도해 지방에서는 ‘아치조금’이라 하는데, 경기만 지방에서는 ‘까치조금’이라 한다. 이렇게 아치조금이 까치조금으로 바뀌었듯이, 아치설이 까치설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골마을에서는 설날에 젊은이들이 모여 마을 어르신을 모시고 합동세배를 해왔다고 하는데 최근 들어 못하고 있다 한다. 이 행사는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정월 대보름에 마을잔치를 열기로 하고 모두가 다 동참해줄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정골은 마을에서는 ‘증골’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시대 말엽 논과 밭을 갈던 보습을 만들던 ‘점’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 된다. 철광석을 캐내 쇳물이 흘러내리면서 증기(수증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불리던 이름이라고 한다.
정골마을을 휘휘 돌아 ‘쉰재계곡’으로 들어섰다
정골은 쉰재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다. 정골에서 계곡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괘석리 용수터(영수터)’로 이어진다. 고개가 길어 쉬어 쉬어가야 한다고 하여 ‘쉬인재’ 혹은 ‘용수령’이라고 한다. 괘석리에서는 ‘오십고개’라고 하는 이 고개는 ‘고석산’과 ‘안덕’ 뒤 능선사이를 넘는 고개다. 또한 ‘오십고개’라고 하는 데는 마의태자와 관련이 있다.
쉰재를 넘어 용수동으로 가려면 두어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지금은 심마니들이나 약초나 나물꾼들만이 고개를 넘나든다. 사람의 발길에서 멀어지다보니 숲이 우거져 원시림을 이룬다.
쉰재 어귀에는 송어 횟집이 있다. 이 마을 토박이라며 ‘누구나 쉬었다 갈 수 있는 산촌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진 젊은이가 사라져가는 산촌의 농기구등을 열심히 수집하고 있다.
쉰재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니 한 무리의 토종닭이 먹이를 찾아 눈밭을 헤치고 있다. 갈 수 있는데 까지 오르다 돌아서기로 하고 들메끈을 고쳐 맸다.
지난 홍수 때 쓸려나간 계곡 중간 중간 사방댐을 막이 공사를 하였다. 개울은 얼어붙고 날이 어두워져 돌아섰다.
쉰재계곡의 물줄기는 ‘짚은메기골’에서 시작된다.
‘안뒷골(내후동) 웅장골’에서 고개를 넘으면 짚은메기골 어귀로 나오게 된다. 이 고갯길은 용수동에서 쉰재를 넘어 인제로 가던 길이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은 쉰재계곡의 ‘가마소’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폭포수와 가마처럼 물줄기를 밭아내는 소(沼)에서 천렵을 하던 기억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옛날 가마소 위 골짜기에도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고석등’의 한 능선인 가마소등강을 ‘약물둔지’라 한다. 큰 약물둔지의 샘은 굴에서 흘러나오는데 한여름이면 가마소에서 물맞이를 하고 약물을 마신다고 한다. 마을의 등산로를 이루는 큰 약물둔지는 ‘장막골’을 들어서 다시 ‘되박골’을 거쳐 약물둔지에서 약수를 마시고 가마소에서 물맞이를 하고 쉰재계곡으로 내려오게 된다.
정골과 안뒷골은 긴 능선을 경계로 왕래가 많았다. 쉰재 송어장 아래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뒷골’이 나온다. 뒷골로 들어서다보면 개울을 건너게 되는데 개울아래에는 ‘샘뱀보’가 있다. 샘뱀보를 건너 ‘뒷골고개’를 넘으면 ‘안뒷골(내후동) 논골’이 나온다.
옛날에는 정골과 안뒷골은 정월 대보름 날이면 ‘횃쌈’을 하는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정골마을에서 정월 대보름 행사는 쥐불놓기와 윷놀이다.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가 행사성의 놀이가 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쥐불놓기도 정월 대보름날에 행해진다. 정월 첫 쥐날(上子日)에 쥐를 쫓는 뜻으로 논밭둑에 불을 놓는 풍습이다. 원래는 정월 첫 쥐날(上子日)에 쑥방망이에 불을 붙여 들고 논밭둑의 마른 풀에 불을 놓아 모두 태운다. 마을에 따라서는 아이들이 두 패로 갈라 불을 놓고 불의 세기를 겨루기도 한다. 불을 놓는 이유는 쥐를 쫓아내고 마른 풀에 붙어 있는 해충의 알 등 모든 잡균들을 태워 없애며 새싹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또 쥐불로 한 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하는데 이 풍습은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아이들은 한밤중에 깡통에 불을 피워 쥐불놀이를 하기도 한다.
정골마을에서는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개울에 무성한 달뿌리 등 잡풀을 태운다. 이날 젊은이들이 쥐불을 놓아 개울도 정비하고 논 밭 둑서리의 잡초를 태우며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길은 마을을 가로질러 ‘장막골’ 어귀를 지난다. 장막골은 장마가 져야 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장막골로 들어서면 큰약물단지로 오르는 ‘되박골’과 ‘통방아골’이 나온다. 통방아골 막창에서 능선을 오르면 고석등 능선이고 산을 넘어가면 괘석리다.
장막골 어귀부터는 넓은 구릉을 이룬다. 공회당이 자리 잡았던 자리를 중심으로 ‘웃뭇골’, ‘작은탑골’, ‘큰탑골’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때 국민학교가 공회당 자리에 들어서기도 했다. ‘탑골’에는 받침석으로 놓였던 지대석이나 탑신이 흩어져 있다고 하며, 지금도 밭을 갈다보면 기와장이 나온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탑골에 있던 절이 괘석리 ‘수태’로 옮겨갔다고 한다.
‘영골’은 탑골 아래 둔덕을 이루는 곳이다. 뒷길을 따라 ‘경수고개’를 넘어 ‘무레이’로 이어진다.
정골은 개울을 중심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경로당과 마을회관, 게이트볼장은 마을 입구에 자리 한다.
마을회관을 지나 개울을 따라 올라오다보면 개울건너편 바위사이로 굴이 하나 있다. 금광을 캐던 굴이라 한다. 금을 캤는지 모르지만 어렸을적에는 담력을 기르던 굴이라고 한다. 그 굴 윗둔덕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멋스러운 몸짓으로 풍경을 자아낸다.
마을회관을 지나 내려오면 길은 다리를 건너 ‘나오정(나가정)마을’로 가는 길과 중학교 앞을 지나 ‘감푸래미’로 가는 길로 갈라진다.
감푸래미는 중학교를 중심으로 뒤쪽 골짜기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제이드병원 오른쪽의 골짜기는 ‘감탄골’이고 병원뒤로 둔덕을 올라 이어지는 골짜기는 ‘준영골’이다. 준영골 어귀는 ‘떼둔지’라 하고 준영골 건너편 골짜기는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준영골 길로 오르다가 왼쪽으로 들어서면 ‘욕개골’로 들어서게 되는데 제재소가 있다.
다시 길을 나와 ‘나오정마을’로 들어섰다.
나오정마을은 ‘라가정(羅家亭)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백여년전에 라씨의 정자가 있었다 하여 라가정 뜰이라고 한다. 정자가 있던 자리는 라가정 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나가정 앞뜰에 44번 국도가 지나고 있으며 마을의 운동 시설이 들어 서있다.
나가정 뜰에서 경수로 넘나들던 ‘경수고개(나가정고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인삼밭이 펼쳐져 있다.
고개를 넘어 경수골로 들어섰다. 경수골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긴 물줄기는 괘석리에서 시작된다. 이제 길을 거슬러 괘석리로 향한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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