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이다. 소한은 해가 양력으로 바뀌고 처음 나타나는 절기다. 소한 때는 ‘정초 한파’라 불리는 강추위가 몰려오는 시기이다.
‘소한땜’이 아니라해도 이때는 전국이 최저기온을 나타낸다. 그래서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든가 “소한 얼음 대한에 녹는다”고 할 정도로 춥다.
농가에서는 소한부터 날이 풀리는 입춘 전까지 약 한달간 혹한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아침에 길을 나서니 눈꽃이 피어 아름답다. ‘설화(雪花)’, ‘상고대’, ‘빙화(氷花)’, ‘수상(樹霜)’, ‘나무서리’로 부른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다. 가장 흔한 게 설화다. 말 그대로 눈이 나뭇가지에 쌓인 것이다. 바람이 불면 날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상고대는 눈꽃과 다르며 일종의 서리다. 나뭇가지가 머금은 습기가 기온이 내려가면서 얼거나, 구름이 스쳐가다가 얼어붙은 것이다.
빙화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 이른 아침에 흔히 볼 수 있다. 설화나 상고대가 녹아 흐르다가 기온이 급강하할 때 그대로 얼어붙은 것이다. 햇살을 받으면 수정처럼 영롱한 빛을 발한다.
‘솔모등(솔모정)’을 지나면 ‘내후동(안뒷골)’이다. 솔모정은 풍수상 심은 나무라고 한다. 이 마을의 형상이 ‘배’형이어서 우물을 파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여 함부로 파지 못했다고 한다.
개울은 마을 중심을 가르며 흐르고 왼쪽 산 밑으로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긴 능선은 마을 뒷산을 이룬다고 하여 뒷동산이라고 부르며 장남리와 경계를 이룬다. ‘움막골’, ‘집덕골’, ‘홀짝골’ 등 골짜기가 있는데 ‘홀짝골’은 호랑이가 사람을 홀딱 집어 삼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는 구릉을 이룬다. 크게 ‘논골’이라 부른다. 그러나 골짜기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임신애골’은 동네 총각과 처녀가 연애하러 갔다가 임신이 돼서 붙여진 이름이다.
‘논골’을 들어서서 ‘정골고개’를 넘으면 ‘정골’로 이어지고 ‘웃뭇골’, ‘삼재골’ 등의 골짜기가 나온다.
‘안뒷골’ 논의 물꼬는 ‘은장골(웅장골)’ 어귀에 있는 ‘구보’에서 흘러온다. ‘은장골’은 골 어딘가 은을 감추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하며 또 은광산이 있어 붙여졌다고도 한다.
막치기에서 고개를 넘으면 ‘정골’ 막치기와 만나 ‘쉰재’(쉬인재:괘석리와 자은리의 경계)를 넘어 ‘용수동’으로 가기도 했다.
‘은장골’ 어귀부터는 계곡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붕어바위’가 있다고 하여 찾아보며 계곡을 올랐다. ‘절골’과 ‘큰골’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절골’안으로 들어가면 ‘고메굴’이 나오는데 나물이 많다고 한다.
길은 다시 다리를 건너 ‘벼락바위’를 끼고 돈다. 건너편으로는 ‘쇠지골(쇠죽골)’이다. ‘절골’을 지나면 개울건너 횟집이 나온다. 이 집은 원래는 개울가에 있었다. 그런데 2001년 폭우로 집이 쓸려가서 산 밑에 다시 지었다.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송어를 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폭우에 다 떠내려가고 조만간 다시 양어장을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한 겨울인데도 찾는 이들이 많다. 잠시 들어오라는 주인의 말에 들어가니 돌배즙을 한잔 주신다.
향이 좋다. 따뜻하니 잠이 온다. 몸이 얼었던 데다가 발효가 잘된 돌배술 한잔에 깜박 잠이든 것이다.
금을 캐는 꿈을 꾼 것 같다. 벌떡 일어나 ‘대명어터’로 오른다.
길을 따라 드문드문 집들이 있다. 이곳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집들이라 마을에 대하여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한다.
집집마다 장작더미가 잔뜩 쌓여있다.
건너편으로 골짜기가 보인다. ‘큰너덜골’, ‘작은너덜골’이다. ‘너덜’이란 원래 ‘너덜겅’이다. 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을 말하는데 줄여서 ‘너덜’이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 돌무더기가 많다고 한다. 아마도 금광과 관련이 있을 듯 싶다.
‘자은리 안뒷골’과 ‘괘석리 대명어터’의 경계는 다리이다. 다리를 건너 구비를 돌면 왼편으로 작업대기소가 있고 그 앞에 제설장비차가 서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저씨들이 난로를 피우며 라면을 끓이고 있다. ‘대명광산’이 있던 곳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개울 건너 산을 가리킨다. 금광굴이 아직도 남아 있느냐고 물으니 지난 폭우에 다 무너지고 휩쓸려갔다고 한다.
‘대명광산’은 현재 휴광중이다. ‘마춘선(馬春善)’씨가 처음 금광을 발견하여 채광을 하다가 일본인에게 넘겼다(빼았겼다)고 한다. 그 후 본격적으로 금이 채굴되었는데 감독만 100여명에 인부가 무려 880명의 규모로 전국 제2의 채금실적을 올렸다고 한다. 광복이 되고 난 이후에도 채광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금이 얼마나 많았던지 홍수가 나서 채굴한 바위가 떠내려 오고 웅덩이를 만들면 그 웅덩이에도 금이 뭉쳐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뒷골에는 금광에서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 아직 살고 있는데 품삯이 얼마나 낮았던지 숨겨 나오거나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대명광산이 들어오고 나서 생긴 이름이 ‘신흥동’이다. 밤이면 골짜기마다 환하게 전깃불을 밝히고 골짜기로 이어지는 길목마다 술집이며 이발소, 함바집(밥집)이 즐비하게 늘어섰다고 한다.
2001년 대한광업진흥공사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홍천 백암광산은 t당 금 함유량이 0.01~3,356g, 은이 12.8~2,773g에 달하는 노다지형 금맥이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t당 금 함유량이 2천~3천g 이상인 경우 노다지형 금맥으로 분류된다.
작업대기소가 있는 자리는 금광석 방앗간이 있던 터라고 한다.
‘대명어터’는 신라말기의 마의태자와도 관련이 있다. 그 이야기는 괘석리 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대명어터 안쪽은 ‘전나무골’이다. 골이 깊다. 골 안에도 수많은 골짜기들이 있으나 아는 분을 찾지 못했다. 골막은 ‘쇠뿔산’, ‘가마봉’으로 이어지며 거기서 물줄기가 시작된다.
능선마다 비껴드는 햇살이 금빛처럼 반짝인다. 몸속은 뜨겁지만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새어나오고 목도리를 두른 입가에는 얼음이 언다.
저녁땅을 밟으며 원동 삼거리까지 나와 읍내로 나가는 차를 기다린다.
눈꽃을 만난 건 원동 ‘새덕고개’에서였다.
‘흙둔지’와 ‘너븐나들이’를 지나 갓길로 빠져 원동골로 들어선다. 지명산을 중심으로 장남리 남덕동과 자은3리 아랫거리와 원동리가 맞닿아 있다. 자연스럽게 삼거리를 이룬 이곳에는 식당이 들어서 있다. 이곳 세 골짜기의 물이 모여 ‘광탄(너븐나들이)’을 이루며 흐른다.
원동골을 들어서면서 나를 반기는 눈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린다. 가마봉과 매봉 가리산을 잇는 능선을 따라 원동골은 깊어진다.
‘감미봉(노적봉, 갓모봉)’의 능선이 왼쪽 편으로 둘러서고 개울 건너 지명산이 에두른다. 그 사이로 물길 따라 길이 이어진다.
지명산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노루바위’는 원동골을 향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쇠돌산이라고 한다. 이 산에는 고양이와 쥐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지명산은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노려보며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다.
옛날 지명산 앞 감미봉 기슭에 지(홍)씨네가 살고 있었다. 지씨네 집에는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고 지씨네 며느리는 손님 대접으로 쉴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찾아온 스님께 시주를 하고 며느리는 자신의 처지를 말하였다. 스님은 딱한 사정을 듣고 손님이 안 오게 할 수는 있지만 나중에 나쁜 일이 생긴다며 말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래도 며느리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스님은 앞산(지명산)을 바라보고 뒷산(감미봉)을 바라보더니 손님이 많이 들게 생겼구나. 저 앞에 보이는 산(지명산)의 산혈(山穴)을 끊으면 손님이 안 들겠다‘ 하였다. 그런 뒤 몇 해가 흐르고 왜놈들이 이곳으로 길을 닦기 시작하였는데 며느리가 길 닦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먼저 산 뿌리로 길을 내게 했다. 꼬리처럼 생긴 부분을 끊어서 길을 내자 갑자기 끊긴 산혈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길 닦는 인부들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길을 냈다고 한다. 그 후 지씨네 집에는 손님이 안 들고 될 일도 안 되는 등 재난이 들어 망했다고 한다.
수년이 지난 후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산(지명산)이 고양이 형상인데 쥐가 이집의 노적봉을 노리고 있으나 고양이 때문에 엄두도 못 내다가 꼬리가 끊어져 죽게 되자 마음대로 재물을 물어가 집안이 망했다고 한다.
지씨네가 살던 집 뒤의 산은 노적가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노적봉’, ‘갓모봉’이라 하고 앞산은 쥐의 형국이며 쥐 때문에 지씨네가 망했다고 하여 ‘지명산’이라 한다.
오늘은 골막에서부터 내려오기로 마음먹고 원동 골짜기로 올랐다.
길은 ‘다릿골’을 지나면서 ‘대대울’과 ‘조덕골’로 갈라진다. 삼거리다. 어느 골로 갈까 망설이다가 조덕골로 들어섰다. 아스콘 포장이 이어지는 골막까지 들어서자 눈밭이다. 원동 버스종점이다. 둔덕 위에 외딴집으로 들어가니 할머니가 나오신다.
할머니가 사시는 이곳은 ‘절골’과 ‘터골’ 사이쯤이다. 아이들이 놀러와 집 앞 언덕배기에서 눈썰매를 타고 있다.
“이곳에 살면서 안 가본 데가 없지요. 나물도 뜯고 약초도 캐러 다니다 보면 하루해가 다 넘어가지요. 조덕골은 매봉줄기에서 이어지는데 골막에 올라가면 나물이 쫙 깔렸지요. 고개도 넘는 줄 모르고 춘천 조교리까지 간적도 여러번이지요.”
매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골짜기는 ‘장사랑골’ 안의 ‘큰골’과 ‘멀골(원동)’ 골짜기를 이룬다.
‘매봉’은 오르는 방향에 따라 ‘큰골고개(매봉재)’ 또는 ‘삽다리고개’, ‘무애고개’로 부른다. 원동에서 고갯마루 턱까지 오르다가 ‘증밭치’가 나오고 고개를 넘으면 소양댐으로 이어진다. 삽다리 고갯마루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밤나무골’과 ‘터골’을 합쳐져 개울을 이룬다. 터골에는 두집이 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만 들어와 산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고 언덕을 내려오는데 골막에서 두 사람이 내려온다. 한손에는 커다란 벌집이 들려있다. 말벌집이다. 말벌은 대표적으로 장수말벌, 좀말벌, 황말벌이 있다. 크기가 크다면 장수말벌이고, 색깔이 노랗다면 황말벌이다.
본초강목에서는 노봉방(Nidus vespa)은 호봉의 봉소(벌집)로서, 효능은 거풍공독(풍을 물리치고 독을 없앤다), 산종지통(종기를 없애고 통증을 멎게 함)이라고 하였다. 외용으로는 노봉방만을 다려서 유옹, 옹저(악성종기), 악창(고치기 힘든 악성 부스럼)에 발라 씻어 주라 하였으며 외과, 치과에 치료 및 살균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노봉방은 말벌집을 말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프로폴리스를 뜻하는 ‘노봉방(露蜂房)’이 해소, 천식에 효능이 있다고 나와 있고 말벌집을 살짝 볶아서 가루를 내어 먹거나 술에 타서 먹으면 정력이 강해진다고 한다.
초여름은 프로폴리스 수확기이다. 이 시기에 꽃, 수복, 당송, 왜전나무, 자작나무, 떡깔나무 등으로부터 수지를 채집하여 돌아온다. 여기에다 벌자신의 침을 섞어 혼합하여 만든 것이 바로 프로폴리스다.
옛부터 허약한 노약자와 불치한 병약자가 야생 벌집을 다려먹고 치유하였고, 장복하였던 노인은 백발이 검게 되고 정력이 왕성해져 손이 번창하였다고 전해진다.
할아버지는 대를 이어 이곳에 산다고 하면서 ‘조덕골’은 골은 깊지만 골짜기가 많지 않다고 한다.
골짜기가 깊다면 ‘절골’이 그나마 깊은데 화전을 할때는 사람이 살았지만 지금은 모두 떠났다고 한다,
버스 종점에서 내려오다가 개울건너 오른쪽 골짜기가 ‘절골’이다. 절(암자)이 있었다는 소리만 들었을 뿐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절골을 지나면 ‘고개골’이다. 산비탈에 길이 나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장사랑 큰골’로 이어진다. ‘함정골’은 사냥할 때 함정을 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벌골’과 ‘상상재’, ‘쇠죽골’은 ‘조덕골’ 어귀의 골짜기다.
삼거리에서 다대울(대대울) 쪽으로 들어섰다. 조덕골을 지나 ‘삽다리고개’를 넘나드는 길은 등산객들에게는 잘 알려진 길이지만 마을에서는 거의 왕래가 없다.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조교리로 넘어가는 길은 소양댐에서 배편을 이용하거나 ‘원동-다대울-새덕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강태공들에게 이 길은 낯익은 길이고, 새덕고갯마루에서 가리산 등반과 ‘매봉-삽다리고개-삼각점-건니고개’로 이어지는 산행의 들머리이기도 하다.
눈 내린 능선을 찾아 나선 이들이 삼삼오오 내려오고 있다. 어깨위로 김이 피어오른다.
사람은 한 마리 순한 짐승이다. 나는 그들을 자연인이라 부른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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