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는 얼음이 얼어 반짝인다.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에 더욱 춥게 느껴진다. 눈 내린 풍경 너머 골짜기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저녁연기가 마을을 휘감는다. 일찌감치 저녁군불을 넣나보다. 골짜기라 해도 일찍 지고 마실 갈 곳도 없다. 문득 윤동주 시인의 ‘굴뚝’이란 시가 생각난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 몽기 웬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 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 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 윤동주의 굴뚝 -

이런 시절이 있었다. 가난이 슬픈 것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간을 건너온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궁이에선 감자가 노릇노릇 익어갈 것이다. 추억은 구운 감자를 꺼내 먹는 것이다. 입술이 시커멓도록 추억은 묻어난다.
44번 국도에서 다시 ‘강지동골’로 들어선다. 쥴 쟝루이 소령 동상 건너편이다. 강지동은 강씨들이 모여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주로 나무를 해다 팔며 살았는지 ‘강지나뭇골’이라고 한다. ‘강지’란 장작 한짐(장작100개비)를 말하는 강원도 사투리다.
강지동과 장사랑골 사이의 능선은 ‘딱정말래’라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쥴 쟝루이> 소령이 이곳에서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또 강지동 어귀의 ‘도덕골’에서 부상을 당했다고도 한다.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임엔 틀림없다.
‘도덕골’은 도둑떼가 행인을 괴롭혔다 하여 ‘도둑골’로 불리운다. ‘도둑골’은 국도에서도 건너다보이는데 그 골짜기 ‘도덕골’을 지나면 ‘풍덕골’, ‘탑골’이다. 골짜기 안으로 이어지는 길은 눈으로 덮여있고 전봇대가 한 마장쯤씩 서있다.
‘강지동골’ 안으로 들어가면서 바퀴가 미끄러진다. 결국 차를 돌려 내려오다가 조길남(70)씨 댁에 들러 골짜기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 안으로 올라가면 왼쪽으로 ‘강지나무골’이 있다. 이 골짜기에는 여름에만 들어와 사는 서울 사람의 집이 있다고 한다. 고개를 넘어가면 ‘원동’이 나온다.
똑바로 올라가면 ‘적두골’과 ‘안산골’이 나오고 막치기에서 ‘벚나무고개’를 넘으면 ‘원동 조덕골’이 나온다. 춘천을 넘어 다닐 때는 ‘원동 조덕골’을 지나 ‘삽다리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강지동 건너편은 ‘원거리’다. 이곳에 <쥴 쟝루이>소령 동상이 서있다. <쥴 쟝루이> 소령은 1916년 10월28일 프랑스 앙리베시에서 태어나 1950년 9월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이동병원의 의무대장으로 복무하며 부상병은 물론 대민 진료에 적극적으로 나서 의사로서 본분을 다하였다.
1951년에 두촌면 자은3리 ‘외후동(가후동, 뒷골거리)’에 주둔하며 지역주민을 치료해주었는데 1951년 5월8일 두촌면 장남리에서 지뢰를 밟은 국군 2명을 치료한 후, 중공군이 설치한 지뢰를 밟아 34세의 젊은 나이로 산화하였다.
쥴 쟝루이 공원은 1986년 10월25일 한·불 수교 1백주년 및 쥴 쟝루이 산화 제35주기를 기념하여 전사지인 두촌면 장남리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쥴 쟝루이 공원 뒤쪽은 장남초등학교터였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강원도 농업기술원 옥수수시험장’이 나온다.
한여름이 그리워지는 이름이 옥수수다. ‘옥수수’ 얼마나 촌스런 이름인가? 그러나 나는 강원도의 힘을 느낀다.
옥수수가 강원도의 맛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 맛은 강인한 생명력에서 나온다. 화전을 하지 않으면 씨앗을 붙일 수 없던 강원도 골짜기 골짜기마다 옥수수를 심었다. 겨울밤에는 사랑방 가득 옥수수를 부려놓고 손이 부르트도록 땄다. 아버지는 따기 좋게 송곳으로 듬성듬성 타개 놓고 우리 형제들은 손바닥으로 비벼대며 하루저녁에 서너 자루씩 땄다.
그게 추억일 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겠다. 먹고 살아야만 했던 세대에서 이제는 홍천의 명품브랜드로 자리를 잡고 있는 홍천찰옥수수.
나는 옥수수를 좋아한다. 여름철 시골에 가서 어머니와 옥수수를 따다가 껍질을 벗겨 옥수수를 삶는다. 부엌에서는 옥수수 단내가 풍겨 나오고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뒷마당 평상에 앉아 먹었다. 뜨거우면 어머니는 젓가락에 꽂아 주셨다.
홍천찰옥수수는 담백하면서도 고소하다. 특히 당도가 높아 달고 차진데다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홍천 5대명품중의 하나인 찰옥수수는 2006년 지리적표시제15호로 등록됐다.
‘강원도 농업기술원 옥수수시험장’에서 개발한 홍천찰옥수수는 미백찰, 흑점찰, 미흑찰, 미백2호로 당도가 높고, 아밀로펙틴 및 단백질 함량이 높으며, 외관, 찰진 맛, 고소한 맛과 씹는 맛이 뛰어나다.
여름철에는 어디를 둘러봐도 옥수수 밭이다. 바람이 불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두촌 장남이 홍천찰옥수수의 주 생산지이다. 홍천의 찰옥수수 축제는 옥수수가 익어가는 한여름에 펼쳐진다.
‘강원도 농업기술원 옥수수시험장’ 뒷골짜기는 남덕골이다. 밭에는 옥수숫대를 세운 낟가리가 듬성듬성 서있다. 남덕골은 남양 홍씨가 들어와 덕을 베풀면서 잘 살던 곳이다. 지금은 장남 네거리를 중심으로 모여살고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남덕동(현덕동)’이다.
남덕동은 양지바르고 너른 둔덕이다. 마을 한복판에 서있는 은행나무는 ‘장일목’이라 하여 홍천군의 보호수다. 300년이 넘은 이 은행나무 뒤로 두촌면사무소가 있었다.
백두산휴게소가 있는 아랫거리(외후동)는 지명산(쇠돌산)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곳이 ‘수구메기’다. 수구메기에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섰었는데 길이 나면서 사라졌다.
지명산이 감싸 안은 남덕동은 골이 많다. 남덕동은 마을을 아랫말 윗말로 나누는데 그 기준은 ‘달골’ 어귀에 있는 ‘성황터’다. 지금 이곳에 성황당은 없고 빈 건물이 나무들에 휩싸여 있다.
‘논골’은 홍한약방 아래 골짜기고 ‘달골’은 홍한약방을 지나는 골짜기로 안으로 들어간다. 달골 어귀를 지나 ‘귀룽나무골’과 ‘석산에골’을 지나면 비로소 달골이 나온다. ‘가문테골’은 달골과 갈라지는 골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원두막골’, ‘심밭골’이 나온다.
달골 막치기에서 고개를 넘으면 ‘강지동’이다. 나물을 뜯으러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달골이라 이름이 붙은 까닭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서 왔다고 한다.
달골 어귀를 지나 마을 안길을 걷다보면 성황당터가 나온다. 아랫말 윗말을 넘나들던 고샅길이었으며 고사도 지냈다고 한다.
‘쇠골’과 ‘집뒤골’은 마을 경로당 뒤쪽이다. 물은 흐르지 않는 골짜기다. ‘넘은골’ 또한 물이 흐르지 않지만 원동이나 강지동으로 넘어가던 옛길이 남아있다.
마을 앞으로는 44번 국도가 지나가고 길 넘어 뜰이 펼쳐진다. 개울건너 골짜기는 ‘풀골’이다. 풀골은 ‘호양골’, ‘가는골’, ‘산수골’, ‘은골’, ‘중방바위골’, ‘설통바위골’, ‘바른골’을 거느리고 막치기에서 ‘가마봉’으로 이어진다.
가마봉은 소뿔산과 함께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강원영서 지역의 산맥은 영춘지맥을 이룬다. 영춘지맥(寧春枝脈) 이란 한강기맥을 가운데 두고 북으로 가는 춘천지맥과, 남으로 흐르는 영월지맥을 연결하여 부르는 약칭이다.
그중 춘천지맥은 한강기맥 ‘노고산’에서 북으로 분기하여 ‘응봉산’, ‘백암산’, ‘소뿔산’, ‘가마봉’, ‘건니고개’, ‘매봉’, ‘가리산’, ‘대룡산’, ‘연엽산’, ‘봉화산’을 지나 춘천대교에서 북한강으로 스며드는 산줄기다. 그 길이만도 127㎞에 이르는 긴 산줄기다.
등산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능선이 이루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기암괴석의 봉우리들이 볼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접근성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중심으로 식당과 휴게소가 많다.
장사랑골막의 ‘복상나무골’과 ‘박달나무골’, ‘새메기골’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강지동 ‘강지나무골’에서 흘어내리는 물줄기와 합쳐져 산 밑을 따라 흐르다가 ‘풀골’에서 흘러내려온 개울과 합쳐져 ‘주령골’ 어귀 산 밑으로 흘러간다. 풀골도 깊지만 주령골도 깊다. 고개를 넘으면 ‘안뒷골(내후동)’이다. 개울물은 주령골을 만나면서 물머리를 ‘지명산’ 쪽으로 바뀐다.
개울을 따라 내려왔다. 일반적으로 억새라고 하는 달뿌리가 무성하다. 하얀 눈과 잘 어울린다. 개울에는 천렵을 할 만한 소(沼)나 담(潭)은 없다. 얼음이 언 곳에선 미끄럼을 탄다. 눈 밟는 소리와 갈대밭을 헤치며 걷는 소리가 사락사락 섞인다. 개울 한편으로는 긴 산 능선이 따라 흐르고 또 한편으로는 강둑이 개울과 함께 간다.
긴 능선에는 고개가 있는데 남덕골에서는 고개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안뒷골(자은3리)에 가서 물어보니 ‘달구고개’라 하고 그 고갯마루에는 성황당도 있었다고 한다.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국도로 올라섰다. 개울 건너 둔덕은 뜰을 이룬다. 뜰을 중심으로 ‘외후동(가후동, 거리뒷골, 거래뒷골)’이라 한다.
백두산 휴게소에 들러 뜨끈한 우동국물로 몸을 녹인다.
옛날에는 ‘장남 원거리’를 ‘주막거리’ 또는 ‘웃거리’라 하고 백두산 휴게소를 중심으로 하는 이곳을 ‘아랫거리’라 했다. 휴게소가 옛날의 주막거리를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휴게소 뒷골짜기는 ‘지명산’과 닿는다. 이 골짜기로 들어서면 ‘약물둔지’가 있는데 근처 동네사람들은 다 아는 약수터다. 가끔 휴게소에 들러 약물을 받아 가는 사람들도 있다.
‘원동 삼거리’에서 보면 그만그만한 세 물줄기를 만난다. ‘장남리’와 ‘자은리’, ‘원동리’에서 흘러오는 개울물이다. 마을이 서로 맞붙어있는 데다가 세곳(장남, 괘석-자은, 원동)의 물줄기가 합수를 이룬다. 그 물이 실어 날라 이룬 너른 뜰이라 하여 ‘광탄’이라 한다. 그러나 ‘너븐나들’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부른다.
백두산 휴게소에서 길 건너 외후동(가후동, 거리뒷골)으로 들어섰다. ‘후동’은 ‘솔모등’을 기점으로 ‘외후동’과 ‘내후동(안뒷골)’으로 나눈다.
두촌면 후동(자은3리)은 2001년 7월23일 폭우로 지형이 바뀐 마을이다. 당시 강원도민일보에 게재된 당시의 상황은 이렇다.
- 23일 새벽 시간당 70㎜ 이상의 폭우가 쏟아진 홍천군 두촌면 자은리 일대는 번듯했던 마을이 하천으로 변해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폐허로 변했다.
이날 새벽 2시45분쯤 홍천군 두촌면 자은3리 박기남씨(61) 집 등 이웃집 5채가 갑자기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박씨의 아내 조영임씨(55)를 비롯해 휴가를 얻어 친정에 온 딸 박정옥씨(27·충북 청주시)와 사위 최해원(31)씨 부부 및 100일을 갓 지난 최씨의 딸 윤정양(1)이 실종됐다.
박씨는 급류에 쓸려 내려가다 30여m아래 지점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있던 중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119 구조대에 의해 사고 4시간만인 오전 7시쯤 극적으로 구조됐다.
또 박씨 집에서 5m 가량 떨어진 곳에서 혼자 살고 있던 임연옥씨(75·여)의 집도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며 임씨가 실종됐다.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집중호우로 두촌면 자은3리 20여가구 중 5가구가 흔적도 없이 비에 쓸려 내려갔고 6가구가 침수돼 주민들은 인근 고지대 이웃집과 내후동 교회에 대피해 있다.
또 자은3리로 이어지는 교량이 집중호우로 끊겨 한때 주민 40여명이 고립됐다가 군헬기에 의해 구조됐다.
현재 자은3리는 전기와 통신도 모두 두절된 상태다.

외후동으로 들어가면서 전쟁 같던 그날의 마을을 생각했다. 지금 그 상처는 다리를 놓고 축대를 쌓고 길도 새로 확포장 했다.
외후동은 크게 ‘외후동’과 ‘미간지’, ‘가느레’를 합쳐 부른다. 외후동에서 골짜기라면 ‘준령골(주령골)’과 ‘청산에터’를 들 수 있다. 준령골을 올라가면 너른 둔지가 나오는데 ‘넓적등’이다. 한때는 사람들이 살았다.
외후동은 장남천과 앞개울(안뒷골에서 흘러오는 개울) 사이의 마을인데 ‘미간지’는 앞개울 건너편이다. 원동에서 흘러드는 물줄기가 4차선 국도 아래로 보인다.
‘가느레골’은 ‘솔모등(솔모정)’에서 개울 건너 산비탈이다. 길은 미간지다리를 건너 제방을 따라 올라야 한다. 가느레골로 오르면 공동묘지가 나오고 고개를 넘으면 ‘정골’이다.
외후동 토박이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이곳이 ‘거지뒷골’이냐고 물으니, 누가 그러더냐며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한다.
‘거지뒷골’은 ‘거리뒷골’ 혹은 ‘거래뒷골’을 비하하는 말이라며 지금은 부자들만 산다고 한다.
그러나 ‘거지뒷골’이라는 이름은 얼마나 푸근함이 느껴지는 마을인가?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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