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지 강가에서 나와 함께 흘러온 내촌천 강물소리를 듣는다. 서너달 동안 동행했으니 정이 들만큼 들었다. 어떤 때는 쓸쓸한 표정을 짓고 어떤 때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로 나를 반겨주었다.
화상대 ‘신여울’의 물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쌍둔지’를 지나 물골안 계곡을 따라 내려오던 얼음길도 기억에 새롭다. 이십여년 전 이곳에 왔을 때의 기억도 떠올랐다.
고만고만한 바위가 나란히 봉우리를 이루는 청벽산 ‘삼형제 바위’는 물골안유원지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봄에는 진달래, 철쭉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바위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에는 쏘가리가 살만큼 토종 물고기가 많았다. 물결은 잔잔하다. 바닥은 모래가 깔려있고 물은 깊지가 않아 물놀이하기에 정말 좋았다.
또 삼형제 바위에 서린 전설은 얼마나 애절한가?
- 시골 살림의 가난한 살림살이에서 벗어나고자 이곳에 살던 세형제들이 각자 흩어져 살다가 10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길을 떠났지. 세형제들은 10년 동안 열심히 살았고 부자가 되었단다. 드디어 10년이 되던 날 다시 이곳에서 만난 형제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형님아 아우야 소리쳐 부르다가 그대로 몸이 굳어 바위가 되었다네.
정말 봉우리에 올라가보면 봉우리마다 굴이 있는데 그때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대로 굳은 흔적이라 한다. 그 굴은 해마다 부엉이가 새끼를 치는 보금자리라고 한다.
삼형제 바위에서 화상대 ‘쌍둔지’까지는 ‘생태보존지역’이다. 눈이 내리고 강물이 얼어붙으면 얼음강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 ‘뜀바위’, ‘두부바위’, ‘뒤웅박바위’ 등 물골안의 경관을 만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수달의 얼굴도 볼 수 있을 만큼 홍천의 청정계곡이다.
그 강을 뒤로하고 홍천강의 또 한 축인 ‘장남천’을 향하여 올랐다. 장남천은 두촌면을 흐르는 강 이름이다. 춘천 양구 인제와 접경을 이루며 골짜기마다 마을을 이룬 지역이다.
‘철정’부터 거슬러 오르는 기행도 생각했다. 그러나 샘통에서 흘러내리는 실개천이 개울을 이루어 강물에 흘러드는 자연의 순리를 다시 마음속에 새기며, 장남천의 막창을 이루는 ‘장사랑골’로 향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다. 영동지역에는 대설이 내렸고 홍천의 골짜기에도 많은 눈이 내렸다. 철정검문소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오른다.
두촌을 돌아 흐르는 강 이름이 ‘장남천’인 것을 보면 장남이 두촌의 중심을 이루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두촌면사무소가 장남 ‘남덕동’에 있었다고 한다. 그 터는 지금 ‘장남네거리’를 이루는 지역인데 그때 면사무소 앞에 서있던 은행나무가 아직도 서 있다.
편의상 ‘쥴 쟝루이 소령 동상’이 서있는 ‘남덕동’을 중심으로 방향을 잡아본다.
앞쪽으로는 ‘강지동(강지나뭇골)’이다. ‘건니고개’ 쪽으로 올라오다 주유소가 있는 곳은 ‘원거리’이고, 오른쪽으로 군부대가 들어선 곳은 ‘솔경지’이다. ‘건니고개기사님식당’ 뒤쪽 골은 ‘숨막골’이고, 식당을 포함하여 건너편 장사랑골 어귀는 ‘어구촌’, 그 골 안쪽으로는 ‘장사랑골’이다. 아래쪽에는 ‘강원도 농업기술원 옥수수시험장’을 포함하여 장남네거리와 국도 건너편은 ‘남덕동’이다.
원거리에는 ‘건이원’이라는 원집이 있었고 또 다른 이름은 ‘주막거리’다. 건니고개를 넘나들던 길목이다.
‘건니고개’는 원거리에서 인제군 남면 ‘어론리’로 가는 낮은 고개다. 고갯마루에는 인제군과 홍천군의 경계 이정표가 서있고 바로 ‘청정조각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남근을 주제로 한 공원이다. 처음 둘러보았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의아했지만 하나하나 다 둘러보고 난 뒤에는 장인정신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공원지기 ‘고명규(67)씨’가 남근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은 한국미술사학을 공부하던 중 고려 인종 무렵의 성인미술에 매료 된 때부터라고 한다. 당시에는 여자들이 혼수품으로 남근을 가지고 갔는데 그 시대의 고달픔을 달래기 위한 노리개였고 또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신앙적 요소도 담겨있었다고 한다.
인제군의 지명유래에 ‘건니고개는 어론 남쪽에서 두촌면 건남리로 가는 고개로 인제군과 홍천군의 경계가 된다. 조선시대 고개 아래에 건이원(建伊院)이라는 원집이 있었으며 고개가 낮아서 「놀기 좋기는 합강정·넘기 좋기는 거니고개」라는 노래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건남리’란 건니고개 남쪽이란 뜻이겠지만, 두촌면에 건남리는 없다.
길이 좋아져 지금은 건니고개에서 인제군청까지는 20분, 홍천군청 까지는 30분정도 걸린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인제현감과 홍천현감 사이에 군계(현계)를 정하는데 의견이 서로 달랐다. 그 의견 차이를 좁히는 방안으로 각 군소재지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말을 타고 달려 서로 만나는 지점을 군계로 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그 뜻에 따라 지금의 군계가 정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때는 머리두(頭)자를 넣어 ‘두촌(頭村)’으로 이름을 지었다가 ‘말촌(末村)’으로, 다시 ‘두촌(斗村)’으로 바꾸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건니고개에서 홍천강의 지류인 장남천의 발원지를 찾아 떠났다.
발원지는 어딜까? 일단 국도를 따라 고갯마루까지 올라왔으니 다시 내려가며 골짜기로 들어서는 수밖에 없다.
‘건니고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시대때 ‘건이원(巾伊院)’이라는 원집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건이원은 원거리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넘어 다녔다 하여 생긴 이름인 듯하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건을 쓴 사람이 넘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고개에서 내려오다 왼쪽으로는 군부대가 있고 건너편에 골짜기가 보인다. 군부대가 있는 자리는 ‘높은터’고, 국도 건너편은 ‘바우메기골’이다.
바우메기 골짜기 안에 사람이 사는가 보다. 눈 위에 바퀴자국이 나있다. 이름만으로는 물이 흐를 것도 같아 들어섰지만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눈길에 바퀴가 조금씩 미끄러진다. 자칫하면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될 것 같다. 자동차소리에 놀랐는지 짐승 한마리가 산속으로 달아난다. 발자국을 보니 고라니다.
할 수 없이 돌아 나와 ‘건니고개기사님식당’에 들러 물어보기로 했다.
건니고개기사님식당 뒤 골짜기는 ‘백정골’이다. 그러나 상스럽다하여 ‘숨막골’이라고 부른다. 식당은 조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손녀딸과 할머니가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산지 오래 되셨죠?’라고 여쭙자 ‘시집 와서 여태껏 지겹도록 여기서 살았다’고 한다. 손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왔다.
할아버지니는 이곳 ‘솔경지’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 터를 잡고 식당을 열었다고 한다. 솔경지는 군부대가 들어서서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다. 솔경지에서 태어나 장가들 때까지 살았기에 골짜기를 다 기억하고 있다며 들려준다.
‘솔경지’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골짜기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으로는 ‘괘석골’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왼편쪽으로 ‘우뭇골’이 나온다. 그 위로 ‘당골’과 ‘절골’을 지나면 막창이다. 능선을 따라 오르면 ‘가마봉’이다.
‘절골’에는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빈대가 하도 많아 불을 질렀다고 한다. 빈대가 뭐길래 불까지 지를까?
‘빈대’는 지금은 보기 힘든 빈댓과의 곤충이다. 몸의 길이는 5㎜ 정도이고 동글납작하며, 갈색이다. 앞날개는 아주 짧고 뒷날개는 퇴화하였다. 머리는 작고 더듬이는 네 마디이다. 배 부분은 편평하고 크며 다리는 세 쌍이다. 집 안에 살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밤에 활동하며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다. 불만 켜면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다가 다시 불을 끄면 덤빈다. 빈대에 물리면 얼마나 가려운지 밤새 긁다가 아침을 맞는다. 그래서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도 생겼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빈대 미워 집에 불 놓는다)’는 말은 손해를 크게 볼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마땅치 아니한 것을 없애려고 그저 덤비기만 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지만 빈대를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불 지르는 것뿐이라는 것도 암시한다. 또 ‘빈대도 낯짝(콧등)이 있다’는 말은 지나치게 염치가 없는 사람을 나무라는 말이고 ‘빈대 붙다’는 말은 (속되게) 남에게 빌붙어서 득을 본다는 뜻이다.
건니고개기사님식당이 들어선 곳은 ‘작은건니고개’이고, 청정조각공원이 들어선 고갯마루는 ‘큰건니고개’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니고개라고 부른다.
‘장사랑골’로 들어섰다. 눈길이다. 햇살이 드는 날이라 녹기도 했지만 미끄럽다. 일단 경로당으로 들어갔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불쑥 들어선 나를 보고 자리를 내주신다. 봄이 되면 나물을 뜯으러 오려는데 나물 많이 나는 골짜기를 가르쳐 달라며 골 이름을 물었다.
장사랑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장사랑(將仕郞- 조선 시대에 둔 종구품 문관의 품계) 벼슬을 한 사람이 피난 와서 오랫동안 살다가 갔다 한다. 100여년 전 그 후손들이 <은을 간방(艮方)에 감추었다>고 적힌 도면을 가지고와서 찾다가 허탕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장사랑이라고 지금껏 부른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애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 옛날 복사골에 장사랑이라는 총각이 살았는데 부자 집 딸과 사랑을 한 거야. 부자집에서는 딸을 총각과 떼어놓으려고 했지. 그런데 사랑이란 게 떼어놓을 수 있는 건가? 결국 총각이 눈물을 흘리며 ‘복사골’로 들어와 두문불출하다가 죽었지. 그 소식을 들은 부자집 딸도 몰래 담을 넘어 총각을 찾아와 애통해하며 울다가 죽었다는 거야. 그 후 이 마을은 장사랑골이 된 거지.
나는 장사랑 총각을 생각하며 장사랑골을 올랐다. 장사랑골은 ‘복상나무골’과 ‘큰골’로 갈라지고, ‘큰골(버니골, 대곡)’은 다시 ‘박달나무골’과 ‘새메기(새목이)골’로 갈라진다
장사랑골은 ‘어구촌’을 지나면서 버덩을 이룬다. 왼쪽으로는 개울이 나가고 오른쪽으로 버덩이다. 버덩을 이루는 골짜기는 ‘큰덕골’, ‘작은덕골’이다.
경로당 앞쪽 개울 건너 골짜기는 ‘몽치미골’이다. 몽치미가 뭐냐고 물으니 몽치미는 목침의 다른 이름이고 또 뒤통수가 튀어나온 짱구를 몽치미라고 한다.
교회는 삼거리를 이루는 곳에 서있다. 옛날에 사용하던 종도 길옆에 매달려있다. 우선 ‘복상나무골’로 들어갔다. 복상나무골은 개복상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골짜기를 넘으면 양구 수산리 ‘무아골’로 이어진다. 골이 깊지만 올라가면서 골짜기는 많지 않다. ‘배나무골’과 ‘재차골’ 정도고 막치기에 이르면 ‘빈골’이다. ‘재차골’은 금광을 캐던 광산골이다.
빈골을 따라 ‘빈골고개’를 넘어 ‘깃대봉’까지 올라가면 ‘모두부치’(홍천·춘천·양구·인제의 경계)를 이룬 깃대봉을 중심으로 빈골고개를 넘게 된다. ‘쌍둔지’-‘빈지골’-‘빈골’-‘샘말’-‘덕거리’를 지나 ‘무아(무애)골’에 닿는다.
‘큰골(대곡)’은 골이 깊다. 막창에 오르면 ‘박달나무골’과 ‘새메기’로 갈라진다. 우선 큰골에 있다는 탑을 찾아보기로 했다. 탑은 ‘중지골’ 어귀에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탑재들을 모아 얹어놓은 이 탑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탑이 서있던 절 이름은 알 수 없다. 이 석탑이 한번 ‘남덕동’으로 옮겼는데 탑이 원래 있던 곳의 집에 불이 나고 좋지 않은 일이 생겨 다시 원위치로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탑을 돌아보며 다시 오른다. ‘물앙에골(물안의골)’을 지나고 ‘덤바우골’을 지난다. 덤바우골에는 사람이 산다. 산위로 오르면 농짝 같은 바위가 있다. 샘도 난다고 한다.
‘숯고골’은 숯을 굽던 골이다. 숯고골을 지나면 길옆에 지붕 낮은 집이 ‘최포수네 집’이다. 홍천에서 알려진 포수는 최포수와 남포수(2008년 사망)다. 4대째 내려오는 최포수를 찾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온다. 연예인 송모씨는 겨울철 나들이로 꼭 찾는다고 한다.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냥 보내지 않는다는 게 최포수 집안의 법도라며 만두국을 끓인다. 홍천에서는 내촌이 사냥하기에 좋은 터라고 하며, 주로 산돼지 사냥을 했다고 한다.
‘박달나무골’은 ‘원동 조덕골(조두골)’로 넘어 다니던 길이며 ‘안목골’과 ‘고개골’이 있고, ‘새메기’로 들어서야 골다운 골을 만난다고 한다,
새메기는 새목처럼 가늘고 길다, 그러나 그 길을 넘어 들어서면 숨이 트일 만큼 넘은 곳이 있다. ‘더랭이’는 작은 골짜기를 말하는 순 우리말이다. ‘더랭이고개’를 넘어 ‘수산리 산막골’로 넘나들던 길이다. ‘배나무골’과 ‘숭수매골’을 지나면 ‘작은새메기’가 나온다. ‘작은새메기’를 지나 ‘웃새메기’를 따라 오르면 헬리곱터 비행장이 나온다고 한다.
장사랑골은 ‘매봉’이 감싸 안은 마을이다. 한때는 전쟁의 길목이 되었지만 이제는 홍천의 북쪽 끝점을 자리하는 마을이다. 눈이 많이 오고 고요한 마을이다. 아침저녁으로 두번 버스가 다닌다.
장사랑골 어귀에는 오래된 도자기 가마가 있었고 솔경지 입구에도 도자기 가마가 있었으나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없어졌다. ‘솔경지’에는 질 좋은 흙이 나온다고 한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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