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비를 갖추어 다음날 다시 찾았다. 바람에 몸이 날아갈 것 같다. 올 들어 가장 추운 추위라 했다. 이런 날이 오히려 반가울 수가 있다.
전설을 따라 백우산에 오르는 길은 색다른 경험이다.
좀 소설적인 이야기가 될 듯 싶지만, 그러나 사실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용마의 흔적을 되집고 가는 길이면서 주인을 찾아 이골저골 울부짖으며 날뛰었을 용마를 애도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이참에 장수와 용마에 얽힌 이야기를 좀 더 하고 가자.
마을사람들은 도관리 아기장수 설화는 망전(亡田)에서 생긴 일이라고 들려주었다.
이야기인즉 이렇다. 내촌 땅에 처음으로 들어온 집안이 전(田)씨인데 와야에서 부자로 살았다. 그 가문에 귀한 며느리가 들어와 옥동자를 낳았다. 아기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렁위에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어미가 이상하게 여겨 아이를 살펴보니 양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있는 것이었다. 장수가 태어난 것이다. 고민 끝에 부모는 아기가 잠든 틈을 타서 팥 석섬을 올려놓았는데 아기가 꿈틀거려 석섬을 더 얹어놓아 죽게 하였다.
장수가 나게 되자 용마도 나왔는데 장수가 죽자 주인 잃은 용마는 ‘우렁골’을 오르내리면서 울부짖다가 ‘말벼루소(말거리소)’에 와서 죽었다 하고 용마가 난 곳을 ‘매짓골’ 또는 ‘망아지골’이라고 하고 죽은 용마를 건져다 묻은 곳이 ‘와야 말무덤’이라고 한다. 그 후 전씨 가문도 기울어 망했다고 하여 망전이라고 한다.
이렇게 듣고 보니 그 이야기도 맞는 것 같다.
마을의 유래나 지형 곳곳에 놓여있는 바위의 형상에 얽힌 이야기를 듣다보면 정말 그럴듯 하다.
나의 고민은 전설속의 마을을 찾을 것이냐 하는 것인데, 분명 연관된 실체가 있을 것 같아 전설에 나오는 지명을 따라 백우산을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또 늦은 점심을 먹게 되는구나. 양지떼소의 식당에서 선지해장국을 먹고 길을 나섰다.
일단 도관리의 ‘약세’ ‘우렁골’ ‘큰골’ ‘거주포’ ‘당벌’ ‘뱃골’ ‘매지골(망아지골)’을 따라 나서기로 했다.
‘약세바위’를 찾아갔다. 약세바위는 ‘구만리’에서 모뎅이를 돌아 나오는 끝자락이다. 보가 막혀있고 너렁바위가 펼쳐져 있다.
그 풍경에 용마가 등장한다.
약세바위에 남아있는 용마의 죽통과 발자국은 주인 잃은 아픔의 흔적이다. 어쩌면 울분을 삼키지 못하고 혀로 핥아 죽통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또 울분으로 버틴 자국인지도 모른다. 주인을 잃은 용마는 마을을 헤집고 날뛰다가 이곳에 와서 물소리에 마음을 비우고 영월 용마의 무덤으로 들어갔는지 모른다.
영월까지 갈 수 없어도 도관동에 남아있는 용마의 죽통과 발자국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위로 약세보가 있고 그 물꼬는 모종촌 건너 버덩으로 흘러든다.
약세에 남아있는 죽통과 발자국이 거센 물살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고향은 신화와 전설이 살아있어 더 그리운 것이다. 그 이야기가 내 삶의 뿌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용마는 모종촌을 지나왔을 것이다. 모종촌은 지금 구국지사 기념비가 서 있는 둔덕말 아래쪽이다. 이곳에 소나무가 들어서게 된 것은 풍수에 따른 일로 산에서 소나무를 캐다 심은 것이 숲을 이루어 모종촌 또는 솔모종이라 하였는데 큰길이 나면서 숲은 사라지고 지금은 그 흔적처럼 몇 그루만이 서서 오가는 바람과 구름과 햇살을 맞아 보낸다.
더욱이 이곳을 중심으로 장이 섰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마을의 중심이 되었다. 장거리에는 ‘백우소주’ 공장도 있었다. 소주공장이 들어서게 된 것은 백우산을 중심으로 금광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금광이 문을 닫자 소주공장도 문을 닫게 된다.
장거리에서 초등학교 뒤로는 둔덕을 이룬다. 백우산의 산줄기가 강으로 내닫는 형상이다. 마을에서는 ‘붉은등’이라고 부른다. 저녁 해가 이 산등에 걸려 아쉬운 듯 붉게 물들이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워 ‘붉은등’이라 하였다 한다.
붉은등은 양지떼소와 경계를 이루는데 ‘둔덕말’을 병풍처럼 에두른다. 지금 초등학교 옆으로 노루길처럼 난 산길은 붉은등을 넘어 양지떼소로 가던 ‘복동고개’다.
둔덕말을 오르려면 내촌면 주민자치센터 옆으로 올라야 한다.
둔덕말은 붉은등의 겨드랑이쯤으로 아늑한 둔지를 이룬다. 지난 여름 내촌의 명품인 단호박과 오이가 백우산의 정기를 받아 싱싱하게 자라던 뜰이다. 또 심신산천의 인삼밭이 펼쳐진다.
둔덕말을 지나 오르면 골짝을 이루는 ‘큰골’이 나온다.
큰골은 백우산의 들머리이다. 일전에 큰골을 따라 ‘큰고개’를 넘어 ‘군넘이(군유동)’로 갔었고 또 ‘큰고개’ 마루에서 백우산 정상을 지나 ‘전망바위’에서 산천경계를 조망한 뒤 ‘가족고개’로 내려온 적이 있다.
지금은 가족고개에서 시작하여 정상 직전에 있는 전망바위를 거쳐 정상에 오른 다음 서능을 타고 ‘안부사거리’로 내려가 북쪽 용소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을 잡는다. 용소계곡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도관리 큰골은 그리 알려지지 않다.
정말 순박한 산촌의 풍경과 소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려면 큰골을 권하고 싶다.
백우산은 도관리쪽으로는 악산(嶽山)인데다가 가파른 절벽이고 군유동쪽으로는 육산으로 완만하다. 두 봉우리 중 왼쪽의 봉우리는 정상이 좀 평평하지만 오른쪽 봉우리는 바위라 산행에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큰골에서 들머리를 잡으면 고생 좀 해야 한다.
큰골에서 군넘이로 가는 고개는 ‘큰고개’ 혹은 ‘군넘이고개’로 불린다. 큰골에서 넘자면 ‘안메기골’로 들어서야 한다. 안메기골로 오르다보면 용마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메짓골(망아지골)’이 있다.
군넘이고개는 ‘매봉(매주봉, 작은백우산)’과 백우산 사이에 있다. 포장은 안되어 있지만 군넘이(군유동)에서는 이 고개를 넘어 일을 보러 다니기도 한다. 또한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 태자’가 ‘도관동’을 지나 ‘군넘이고개’를 넘어 ‘군넘이(군유동)’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그만큼 큰골에는 골이 많다. 백우산에서 흘러내린 능선과 능선 사이를 흐르는 골짜기마다 사람이 살았다. 홍상골, 방재골, 지골, 안메기, 대골, 배골이 큰골을 이룬다. 이 많은 골짜기가 다 백우산에서 흘러내린 것은 아니다. 홍장골, 방재골, 지골은 둔덕말에 닿은 골짜기다.
큰골 어귀는 안뜰이고 안뜰을 지나 왼편쪽으로 오르는 골짜기는 ‘홍장골’이다. 이 골을 넘으면 둔덕말이 나온다. 홍장골 어귀에서 큰골의 계곡을 따라 포장된 길을 오르다보면 ‘방제골’을 지나 ‘지골’ 어귀에 닿는다. 지골에는 큰골목공소가 있고 골짜기를 넘으면 양지떼소아래 ‘벌골’이 나온다.
큰골의 중심은 제각이 서있는 언덕이다. 백우산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한때 계곡이었는지 집채만한 바위가 듬성듬성 놓여있다. 바위가 동산을 이루고 밭 한가운데도 서있다. 송이바위는 땅속에 대궁을 박고 서있고 농바위, 복바위는 울타리처럼 서있다. 특히 주먹으로 두드리면 북소리가 난다는 ‘북바위’에서 장단을 맞추어 노래가락을 뽑는다.
가을걷이가 다 끝난 빈 밭에는 옥수수 섶과 콩 낟가리가 서있다.
백우산의 들머리인 큰골에서 백우산에 오르기로 했다. 오르막이 좀 가파르다. 큰골까지 오르는 길도 산행이나 다름없지만 안메기를 따라 군넘이고개로 오르는 길은 서너번은 쉬어야한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그러나 안메기를 들머리로 잡은 것은 ‘매짓골(망아지골)’을 가기 위함이다. 그곳이 바로 설화의 중심 무대이기 때문이다.
계곡으로 오르는 개울은 바위등걸의 무덤 같았다. 큰골에서 제일 큰 금맥을 찾아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안메기에는 크고 작은 금광굴이 많다. 물소리도 제법 우렁차다.
목덜미가 젖을 만큼 오르다보면 왼편쪽으로 이어지는 골이 나온다. 아기장수가 태어났다는 매짓골이다. 또한 용마가 태어났다는 망아지골이다.
골막으로 들어서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하늘이 나를 반기는 좋은 징조다. 첫눈을 장수와 용마를 찾아 나선 이곳에서 맞다니!
매짓골은 다른 골에 비해 흙이 부드러웠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어떤 기운이 몸에 느껴진다. 신비한 힘이 몸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소나무가 산 둘레를 푸르게 두르고 그 사이로 분화하듯 날리는 눈송이가 어떤 계시처럼 이마에 닿는다.
매짓골에서 태어난 장수는 한밤에 강변에 가서 무술훈련을 한다. 힘들면 ‘쉴바우’에 앉아 땀을 시켰을 것이다. 바로 쉴바위는 ‘우렁골’에 있다. 지금도 큰골보다 우렁골 물이 더 실하다. 매짓골에서 우렁골은 산등성이를 몇 개씩이나 넘어야 하는 꽤 먼 길이다. 장수가 그곳으로 가서 수도를 닦은 까닭은 무엇일까?
장수도 자신의 운명과 세상의 흐름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우렁골로 가서 무예를 닦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장수가 갔다는 우렁골로 발길을 돌렸다. 안메기에서 다시 큰골로 나와 ‘설악골’을 지나고 ‘뒷골’을 지나고 다시 ‘대골’ 장등을 넘어 ‘배골(배뱃골)’로 접어들었다.
배골은 백우산 오른쪽 봉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큰골의 원줄기다. 큰골에서 물이 많이 나고 백우산을 배우산이라 부르는 ‘배바위’가 있는 곳이다.
정말 그 옛날 천지개벽할 시절, 물이 이곳까지 차올랐을 때 누군가 타고 온 배일까? 그때 이 산에 무쇠말뚝을 박아 매어 두었다는 배가 바위가 된 것일까?
형상은 닮았는데 어디에도 무쇠말뚝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물이 빠져나가자 배도 따라 떠내려 오다가 이쯤에서 멈춘 듯하다.
장수도 배바위에 올라 놀았을 터이고 그 위에서 세상을 항해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배바위 까지 오르는 길은 숲이 울창하다. 백우산에서 흘러내린 바위들로 눈은 즐겁지만 몸은 많이 힘들다.
등강 하나만 넘으면 우렁골이다. 그러나 우렁골을 제대로 보려면 ‘거주포’로 나가 ‘동도리’로 올라가야 한다.
우렁골의 물줄기는 큰골과 만나지 않는다. 큰골을 가로지르는 물줄기는 안메기골에서 흘러내리고 대골, 배골에서 흘러오는 물과 모종촌(큰골 안뜰 위쪽 소나무가 서있는 개울가) 어귀에서 합류하여 둔덕말을 감싸 안는다. 그런 까닭에 둔덕말은 웬만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한다.
그래서인지 둔덕말에는 사당이 넷이나 서있다. 그중 하나가 ‘무후자 제각’이다. 자식이 없어 대가 끊긴 48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매년 가을에 제를 올린다.
큰골에서 우렁골로 가려면 ‘덕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러나 길은 풀섶에 덮여 있어 돌아가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장거리를 돌아간다. 첫 눈을 맞으며 당벌 뜰을 둘러보며 거주포로 오르는 길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이왕 내리는 눈 실컷 맞고 싶다. 오늘 못가면 내일 가면 되지 않겠나!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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