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길을 나섰다. 길에서 첫눈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일까? 바람이 불고 쌀쌀한데도 도관동으로 향했다.
‘서곡’이 서곡대사의 탄생으로 붙여진 마을이라면 ‘도관동’은 ‘관을 쓴 사람이 지나간 길’이라 하여 붙여진 마을이다. 그럼 관을 쓴 이는 누구일까? 그것도 촌으로 촌으로 숨어들어 지나가야 했을 인물이라면 누굴까?
누구는 도관동을 ‘독안동’이라 들려주었다. ‘마을이 독안에 든 것 같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도관(道冠)’이란 이름으로 풀이 해볼 때 아마도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아닐까?
‘내촌(奈村)’이 ‘내촌(乃村)’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 1942년이었으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내촌(乃村)으로 표기되어 있다. 누군가 잘못 기록한 듯하지만 내촌(奈村)이든 내촌(乃村)이든 역시 ‘촌’이다.
가도 가도 길은 산을 안고 돌고 그 길은 막창 아니면 다시 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더 이상 갈 수 없거나 길이 뚝 끊긴다.
그래서 내촌 물걸리 동창에 섰던 면사무소도 ‘문현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도관동’으로 옮겼는지 모른다.
문현리를 가려면 도관리에서 ‘당고개’를 넘어 ‘사방거리’에서 강을 건너 ‘사갑’을 지나가야 한다. 사갑은 ‘덕탄’에서 ‘산풀이’까지 물이 감돌아 흐르고 마을 뒤로 ‘더렁봉’의 한 능선이 봉우리를 이룬다. 이집 저집을 찾아 봉우리 이름을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 그 모르는 봉우리에서 골짜기는 시작되고 물이 흐른다.
사갑 위쪽은 ‘더드래기’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버드나무가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덕탄과 강을 사이에 두고 있어 그늘에 가려있지만 앞뜰 같은 덕탄을 정원으로 가진 마을이다.
더드래기와 사갑의 경계를 이루는 골은 ‘거무장골’이다. 골막에서 고개를 넘으면 ‘문현동’이다. 산 밑으로 듬성듬성 집들이 서있고 앞뜰은 넓다. 사갑뜰의 물은 덕탄에서 끌어온다. 수로를 따라 걸어 내려오면 ‘왕대골’을 지나 문현동 어귀가 나온다.
‘구만리’는 사방거리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강둑을 따라 오른편쪽으로 자리 잡은 마을이다. 작은 골짜기들이 보이지만 이름이 없다. 강가에 서있는 소나무들은 알고 있다는듯 몸째 흔든다.
구만리의 절경은 ‘형제바위’-‘독(항아리)바위’-‘산풀이’로 이어지는 강의 풍경이다. 구만리와 사갑을 양옆에 끼고 흐르는 강은 맑은 모래와 바위가 아름답다. 특히 취수장 아래쪽에 있는 형제바위 주변에는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옛날 도관동에서 문현동으로 가는 다리는 구만리 끝자락 산풀이(산뿌리)에 있었다. 그 다리는 지금도 물살의 흔적을 안고 서있다. 낡고 위험하여 차는 다니지 못하고 사람만 다닐 수 있다. 그 다리 아래에 펼쳐진 바위너설과 물소리는 늘 보고 들어도 지겹지 않다. 마을 사람들은 소풍장소로 여름철 천렵장소로 먼저 떠올린다. 다만 흉물스럽게 서있는 다리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 ‘문현동’으로 들어선다. 문현동은 마을 어귀에서 보면 마을이 한눈에 다 보이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윗말과 아랫말로 나뉜다. 마을회관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면사무소가 있던 자리다.
문현동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산과 산이 마주치는 자리에 바위가 문처럼 가로막고 있어 차도 하나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고 ‘문바위’를 지나면 ‘평풍바위’가 버티고 있어 산밑으로 돌아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로 들어서면 아늑하고 고요하다.
‘촉새봉’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봉우리들이 문현동을 에두르고 강으로 이어진다. 문현동의 중심 골짜기는 ‘달롱골’이다. 달롱(달래)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달롱골은 ‘문고개(비선동으로 넘는 고개)’로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깊이 들어간 골이다. 오른쪽으로 등강을 넘으면 ‘빈장골’이다. 빈장골은 손바닥처럼 넓다. 그중 넓은 비탈 둔덕을 이루는 골이 ‘덕밭’이다.
덕밭에서 내려오면 ‘큰우뭇골’인데, 답풍리 ‘작은가래울’로 넘는 고개다.
마을의 자랑이라면 ‘약물바위’다. ‘약물더랭이’라 불리는 산에 있는 이 약물은 굴에서 흘러 나온다. 지금도 약물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약물을 받다보면 굴속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나온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굴은 사람이 팠다고 한다. ‘이 마을에 총각이 살았는데 공부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낙심해 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마을 뒷산에 올라가면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파면 은항아리가 나올 것이다. 그것을 파내어 네 꿈을 이루라’하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총각은 뒷산에 올라 바위를 찾아 굴을 파기 시작했는데 꿈에서 말한 대로 정말 은항아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 항아리를 팔아 공부를 하여 진사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문현동에는 ‘진사터’라는 집이 왼편 양지바른 곳에 있다. 그곳이 총각이 태어나 살던 곳이라고 하고, 그곳에서 초대 대의원을 지낸 ‘이문훈’씨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은항아리를 팠던 굴에서 샘물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물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정한 처녀가 약물을 받으려고 굴 앞에 앉았는데 굴속에서 구렁이가 나와 처녀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약물을 받으러가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찾았다고 한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설마 하겠지만 이 마을에서는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산에 올라 약물을 받아먹고 구만리로 건너왔다.
구만리에서 모종촌으로 빠져나오는 길은 강과 맞닿은 산을 타고 넘어야 한다. 왜 이런 길을 갈까 하다가도 들메끈을 고쳐 매고 다시 걷는다. ‘산풀이’를 돌면 ‘모뎅이’다. 모뎅이는 산을 끼고 돌아간다. ‘지장골’이라는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골을 따라올라가면 너른 둔지가 나온다. 밖에서는 보이지않는 하늘바라기의 고원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모뎅이 앞에는 ‘깻뜰보’가 있다. 이 봇물은 ‘응달떼소’를 지나 ‘솔경지’, ‘삼선대’로 흘러든다.
모뎅이는 강물이 가득하다. 물은 하늘을 품고 땅을 품고 흘러간다. 바람이 일자 물결이 출렁인다. 물에 비친 얼굴이 일그러진다. 풀 섶에 숨어 헤엄치던 새들이 놀라 날아간다. 올겨울도 이 강가엔 한떼의 청둥오리가족이 살림을 차릴 요량이다.
모뎅이를 돌아 나오자 또 보가 보인다. 보는 약세 너럭바위를 발판으로 막았다. 봇물은 ‘양지떼소’를 지나 ‘용포동’으로 흘러든다.
보를 막기 전에 풍경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았는데 ‘약승(藥勝)’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약승’이 ‘약세’로 바뀐 것은 아닐까? 그 한시첩에는 내촌에 관한 시들이 여러편 있다.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소개할 계획이다.
지금도 물과 바위가 잘 어우러진 경치를 보여주지만 당시에는 시 한수 절로 나올 만큼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였다.
백설제의 ‘약승춘유(藥勝春遊)’에는

水勢漣漪作曲流 수세연의작곡류
(물살은 잔물결 지어 굽이쳐 흐르고)
紅綻古査花苒苒 홍탄고사화염염
(늙은 명자나무꽃 붉게 꽃망울지고)
綠鋪平野草浮浮 녹포평야초부부
(넓은 뜰엔 풀이 우거져 푸르름을 더하네)

약승의 물결과 물소리, 붉게 어울어진 꽃과 푸른 뜰을 묘사한 대목이다. 약승대의 풍경이 보이는 듯하다. 지금부터 200여년 전의 풍경이나 지금의 풍경은 그리 다르지 않다. 예전의 풍경이 보이는 듯하다. 그만큼 풍광이 아름다웠던 곳이다. 다만 먹고 살기에 그곳에 보를 막은 것 빼고는 말이다.
‘약세너럭바위’에는 ‘백우산 아기장수’와 관련된 용마의 죽통과 말 발자국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강 건너 마을은 ‘가래울 갯가’다. 예전에는 섶다리를 건너 가래울로 갔다. 섶다리가 없었을 때는 ‘솔경지’로 돌아다녀야 했다. 코앞에 집을 두고 한참을 돌아가야 했던 마을인데 지금은 다리가 놓여 다니기가 수월하다.
다리를 건너면 ‘가래울길’과 ‘논골’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가래울은 다음에 다시 돌아보기로 하고 이쯤에서 돌아 ‘도관동’으로 들어왔다.
도관동은 내촌의 면소재지다. 뒤로는 백우산을 품어 안고 앞으로는 너른 강이 감싸 흐른다. 백우산은 내촌 어디서든 보이는 큰 산이다. 많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산이다.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의 실체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전설을 따라 가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올 것 같다.
옛날 홍천군 내촌면 도관리 백우산 기슭 매지골이라는 마을에 초맹삼이란 어질고 착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농사라고는 화전(火田)에서 나는 감자 옥수수 콩 따위의 밭곡식뿐이고 쌀은 이웃 동리에 가서 몇 되 구해다가 조상의 제사 때나 쓰는 형편이었다. 그의 부인 허을란 여인 역시 마음이 착하고 남편을 잘 공경하여 인근에서 금슬 좋은 부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나이가 오십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항상 시름에 잠겼다.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소생이 없어 대를 이을 옥동자를 얻기가 평생의 소원이었다.
어느 해 가을이었다. 백운산에는 단풍이 들어 울긋불긋 색동저고리를 입혀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부부가 오전 일을 끝내고 잠시 쉬고 있는데 설악산으로 간다는 늙은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다.
마음이 착한 부부는 뛰어내려가 스님을 반갑게 맞았다.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스님을 앉히고 강낭콩을 넣은 밀범벅을 대접한 후 농사지은 콩 한 되를 독에서 퍼다가 시주했다. 그랬더니 스님은 ‘나무아미타불’을 몇 번 되뇌이고는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가을 겨울이 지나고 어느덧 백우산에는 화창한 새 봄이 왔다. 이 때 이들 부부에게는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부인의 몸에 태기(胎氣)가 생긴 것이다. 최씨 부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기왕이면 떡두꺼비 같은 옥동자를 낳아 주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가을이 되자 부인은 드디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아들을 낳았다. 부부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일 뿐 즐거운 일에는 슬픔이 따른다고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백일이 지나기도 전에 기운이 장사였고 더욱 이상한 것은 밤마다 살그머니 나갔다가 자정이 지나서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들어오는 것이었다.
부부는 차츰 겁이 나고 기이하게 여겨 하루는 몰래 뒤를 따라가 숨어서 아들이 하는 행동을 훔쳐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어린 아이는 칼을 들고 무술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행동은 신출귀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비호같았다. 숨을 죽이고 이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본 부부는 장수 아이를 낳은 것을 깨닫고 놀라움과 근심으로 그 자리에서 실신할 지경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방바닥에 엎드려 밤새도록 남몰래 통곡했다. 그 당시에는 장수를 낳으면 나라에 화를 입힌다고 하여 아이가 성장하여 힘을 쓰기 전에 부모의 손으로 죽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도 중죄를 받아야 했다.
장수 아이는 자라면서 무술이 점점 뛰어났고 그 소문은 동네에 널리 퍼져 나갔다. 부부는 애를 태우면서 아이가 방에서 글을 읽는가하고 들여다보면 어느새 강변에 나가 칼싸움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장수아이에 관한 소문은 널리 퍼져 원주에 있는 감영(監營)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장수 아들을 죽이기로 했다.
어느 비 내리는 밤, 뇌성은 천지를 뒤흔들고 번갯불이 쉴 새 없이 번쩍였다. 부부는 굳게 마음을 다지고 잠자는 아들의 몸 위에 콩 두 가마니를 얹었다. 그러나 아들은 움직이지만 못할 뿐 두 눈이 말똥하여 저주하는 눈으로 부모를 쳐다보았다. 이들은 콩 한 가마니를 더 얹어 장수 아이를 죽이고 말았다.
장수가 죽자 장수를 따라 나타났던 용마가 울며 헤매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도 도관2리에 ‘우렁골’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그 때 용마가 울며 내려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쉴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있는데 장수가 쉬었던 바위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내촌강 「약세」라는 곳에 용마의 죽통과 말 발자국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장수를 모실 수 없게 된 용마는 슬피 울면서 헤매다가 크게 한번 뛰어 영월 땅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영월에는 용마의 무덤이 있다고 하며 장수 아들을 죽인 부부는 시름시름 앓다가 오래가지 못해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아기장수전설은 우리나라 도처에서 나타난다. 영월의 용마의 무덤에도 백우산의 전설과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따라서 그 무덤을 확인하는 일은 쓸모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기장수 전설의 비극적인 죽음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아기장수는 천상에서 영웅으로 점지된, 미래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아기장수의 탄생은 곧 기존 질서와의 갈등을 예고한다. 그러나 민중은 이러한 갈등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평민이 주도한 민란이 모두 패배하였다는 역사적 체험과 또 민중들에게 보수적 체제에 안주시키려는 현실 추구 성향을 갖게 하였기 때문이다.
아기장수와 같은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면서도 새로운 미래의 희망조차 버리고 살아야만 하였기에 아기장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애달픔이 서려있어 걷는 길도 무겁게만 느껴진다.
또 다른 전설은 고리봉 전설이다. 아주 먼 옛날 천지개벽할 때 물이 불어 이곳까지 차올라 이산에 무쇠말뚝을 박아 배를 매어 두었다하여 배우산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도 백우산 밑의 ‘배뱃골(배골)’에는 배처럼 생긴 ‘배바위’가 있다고 한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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