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낭고개 아래 펼쳐진 뜰은 안실의 버덩이다.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후두둑 후둑 메뚜기도 날뛴다. 최근에는 웰빙(Welbing)이다 뭐다 하여 메뚜기도 남아나지 않는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메뚜기는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메뚜기를 많이 먹으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학교가 끝나고 일삼아 잡았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에 입맛을 돋우고, 기관지, 천식에 효험이 있다하여 일부러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황금벌판의 들길을 걷는다. 어디선가 누룽지 냄새가 난다. 이 가을에만 맛볼 수 있는 향기다. 가을햇살에 잘 여문 벼이삭에서 나는 이 냄새를 오랜만에 맛본다.
안실 뜰을 가로질러 서곡대사의 생가로 들어섰다. 지금은 허남설씨가 살고 있다.
‘서곡대선사사리탑비명(홍천군 동면 수타사)’을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서곡대사는 17세때 괘석리에 있는 수타사(두촌면 괘석리 절터를 ‘수태’라 부름-이곳에 수타사란 절이 있었다고 한다)에 입산하여 득도를 하여 큰스님이 된다. 천리안을 가진 그의 행적에는 법력(法力)이 느껴진다.
어느날 스님이 아침상을 받고나서 갑자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에 동자승이 ‘어찌 그러십니까?’ 묻자 스님은 ‘합천 해인사에 큰불이 났구나’ 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눈이 동그래져서 ‘어찌하면 좋겠냐’고 여쭙자, 스님은 밥알이 담긴 숭늉 대접을 들고나가 해인사 쪽으로 세번을 튕기고 진언을 외웠다.
그런 다음 동자승보고 합천 해인사에 가보고 오라하여 문밖에 나서는데 벌써 기별이 오고 있었다. 알아본 즉 합천 해인사에 정말 불이 났는데 갑자기 흑문이 나오더니 소나기가 내리고 밥알이 떨어지면서 불이 꺼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곡대사는 그 후 동면 공작산 수타사, 덕고산(횡성) 봉복사에서 주석하다가 수타사에서 입적한다.
다음날 아침 다시 길을 나섰다. 입동이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날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겨우살이를 장만하느라 분주하다. 그중 김장은 겨울 먹거리의 기본이라 중요시 여겼다. 집집마다 배추를 다듬고 절이느라 한창이다.
옛날 어른들은 ‘입동에는 김장을 하면 안된다’는 말을 하곤 했다. 뚜렷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지금처럼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거나 저장시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입동이 되면 김장 재료들이 얼기 때문에 김장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입동에 김장을 할 정도면 겨울이 따뜻해 금세 익어버리기 때문에 겨우내 먹어야하는데 걱정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동 전에 김장을 다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의 김치는 2001년 7월5일 식품 분야의 국제표준인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에서 일본의 기무치를 물리치고 국제식품 규격으로 승인받았다.
김치의 종류도 지역마다 재료마다 달랐다. 그러나 기본적인 재료는 무와 배추였다. 무와 배추를 소금에 절여서 고추·마늘·파·생강·젓갈 등의 양념을 버무린 후 김치곽이나 땅에 묻어 저장하였다.
김장을 한 후 김칫독을 땅에 묻는 데에는 과학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추운 겨울에도 김치를 얼지 않게 할 수 있고, 상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흙으로 빚은 김칫독은 숨 쉬는 그릇이기 때문에 발효과정에 필요한 수많은 미생물을 제공한다. 또 김칫독의 뚜껑도 완전히 밀폐시키지 않고 짚으로 엮은 뚜껑으로 덮어 미생물의 통로를 만들어준다.
김치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약 3천년 전의 중국 문헌 ‘시경’이며, 중국의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인은 술빚기, 장담그기, 젓갈 등의 발효음식을 매우 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종 때의 ‘벽온방’에 “딤채국을 집안 사람이 다 먹어라”하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저’를 우리말로 ‘딤채’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치의 어원에 대해, ‘침채’가 ‘팀채’로 변하고 다시 ‘딤채’가 되었다가 구개음화하여 ‘김채’, 다시 ‘김치’가 되었다고 한글학자들은 설명한다.
김치의 혁명은 고추가 들어오면서 이루어진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7세기 이후다. 우리나라에는 담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한국인의 식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사람을 독한 고추로 독살하려고 가져왔으나 이로 인하여 오히려 한민족이 고추를 즐기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여러 문헌에는 고추가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이재위(李裁威)는 《몽유(蒙纜)》(1850년대)에 북호(北胡)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간에서는 장을 담근 뒤 독 속에 붉은 고추를 집어넣거나 아들을 낳으면 금줄(왼새끼 줄)에 붉은 고추와 숯을 걸어 악귀를 막기도 했다.
암튼 고추가 김장의 재료가 되면서 김치의 혁명이 일어난다. 김치를 일반적으로 ‘지(漬)’라 하고, 제사 때는 ‘침채(沈菜)’라 하며, 궁중에서는 젓국지·짠지·싱건지 등으로 불렀다.
‘침채(沈菜)’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는 뜻이다.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오이·가지·마늘·부추·죽순·무·박 등으로 ‘소금절이’, ‘술과 소금절이’ 또는 ‘술지게미와 소금절이’ 등을 만들었는데, 오늘날의 김치와는 매우 달라서 김치라고 하기보다는 장아찌류에 가까웠다.
김치가 익었다는 말은 김치의 발효가 최고조에 달해 유산균이 가장 많은 상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김치를 맛있게 먹으려면 젖은 손으로 김치를 꺼내면 곰팡이가 생길 수 있으니 마른 손으로 꺼내도록 해야 하고, 김치를 꺼낸 후에는 꾹꾹 눌러 주고 뚜껑을 단단히 닫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계절마다 달마다 해먹는 김치도 다양하다. 봄(3∼5월)에는 돌나물김치, 햇배추김치, 파(봄)김치, 시금치김치, 봄갓김치, 얼갈이김치, 미나리김치 등등을 해먹고, 여름(6∼8월)에는 열무김치, 열무물김치, 부추김치, 오이소박이, 양배추김치, 가지김치, 박김치, 오이지 등으로 입맛을 돋았다. 가을(9∼11월)에는 고들빼기김치, 가지김치, 총각김치, 파김치, 고춧잎김치, 가을갓김치, 콩잎김치, 깻잎김치, 통배추김치, 동아김치, 풋고추김치 등이 있고, 겨울(12∼2월)에는 섞박지, 통배추김치, 보쌈김치, 깍두기, 통무김치, 백김치, 동치미, 총각김치, 호박지 등을 만들어 겨우내 오래두고 먹었다.
특히 강원도에서는 짠짠지, 창란젓깍두기, 채김치, 해물김치, 강릉깍두기, 깍두기, 씀바귀김치, 서거리김치, 동치미, 파래김치, 꼴뚜기무생채, 무청김치 등을 담가 먹었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든지 입맛에 맞는 김치를 먹는 시대다. 올해는 고들빼기김치와 안동 가자미식해를 장만해야겠다.
마당 우물가에서 김치를 담근다. 멀리나간 자식들도 오고 이웃 아주머니도 오셨다. 일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집집이 돌아가며 품앗이를 한다. 그래도 집집마다 맛이 다르다. 그게 우리김치의 손맛이다.
안실 어귀에 강과 어울린 소나무가 한 풍경한다. 이곳은 ‘가사거리’이다. 여름날 스님들이 이곳에 가사를 걸어놓고 목욕을 했다하는데, 스님들이 걸어놓은 가사가 거리를 이루었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가사거리’를 지나 안실로 들어서는 입구에 전불사란 안내판이 서있다. 안길 왼쪽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오르면 ‘여창이’로 넘는 ‘막고개’와 ‘매봉재’로 오르는 길이 갈라진다.
물줄기를 따라 오르기로 한다. 동막동으로 오르다가 개울 아래로 들어서는 신판길이 보이는데 그 길로 들어서면 ‘직시’와 여창이로 넘는 길이 나온다. ‘직시’는 마을의 공동묘지였다.
전불사로 오르는 길은 포장이 되어 있다. 절간 같은 사당을 지나 둔덕배기에 오르면 조립식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전불사’다.
스님이 나오신다. 차 한 잔을 하고 가란다. 법당 앞에 놓인 너럭바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님이 갑자기 묻는다.
‘왜 이런 일을 하느냐?’
좋아서 한다고 하면 너무 뻔한 대답이다. 그래서
‘스님은 왜 이곳에 사시는지요?’ 되묻는다.
거기엔 답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서로가 힘든 일을 하고 있고 또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만 있기 때문이다. 그게 고행이 아닐까?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껄껄 웃다가 차를 마시고 일어섰다. 올라왔으니 내려가야 한다. 그게 삶이다.
가을걷이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고추도 따야하고 비닐도 걷어야한다. 할아버지가 나와 고춧대를 뽑으며 비닐을 걷고 있다. 돌무더기의 둑 서리에는 호박이 달려있다. 밭으로 올라가 ‘덕탄’에 대해 여쭙자 할아버지의 이야기 보따리가 터졌다.
‘덕탄에 가면 바위에 덕탄이란 글씨아래 여러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그분들은 누구래요?’
‘이 마을에서 한 가닥 하던 사람들이지요. 여름이면 물가에 나가 천렵을 하면서 창을 하기도 하고, 한시를 지어 읊기도 했지요. 지금은 다 죽고 자손들도 마을을 떠났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내려가려는데, ‘호박장국을 좋아하면 저 호박이나 따 가시게. 별맛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손수 호박을 따주신다. 호박 두 개를 받아들고 내려왔다.
해도 일찌감치 진다. 오후 네시가 조금 넘었는데 노을이 비껴들기 시작한다. 가사거리를 지날 무렵에는 구만리 하늘가에 구름이 붉게 흘러간다. 저 붉은 구름은 다 어디로 갈까?
아침에 둘러본 덕탄은 벌써 산그늘에 잠기고 ‘복주께바위’의 산봉우리만이 햇살에 비껴 반짝인다. 가사거리에서 사방거리로 내려가는 길옆에는 서곡리의 표지석이 서있고, 지난 여름 환하고 탐스럽게 피었던 꽃들이 가을의 누추한 뒷모습으로 서있다.
길 한편으로 흐르는 강엔 덕탄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바위들이 물살을 휘감는다. 소나무 숲 앞에 ‘서닥바위(새닭바위, 새댁바위)’와 덤바위에 앉았던 새들도 날아간다.
그런데도 마음속에 맺힌 몇몇 단어들이 휘파람으로 날아간다. 그 중 하나가 사랑이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
저 나무가 내게 붉은 나뭇잎을 보냈듯이
내가 꿈꾸는 그 사람에게 사랑한다 편지를 쓴다
이 가을에 사랑하지 않으면 모두가 낯설어질 것 같다
내 삶의 뒤안이 더 쓸쓸하고 외롭더라도
세상의 뒤뜰을 서성이는 바람처럼
세상의 뒤뜰을 비추는 달빛처럼
그 사람에게
이 가을을 만날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다고

- 가을편지 -

‘사방거리’에서 길은 네 갈래로 갈라진다. ‘거주포’와 ‘사갑’, ‘서곡’, ‘도관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서 사방의 길을 본다.
다리를 건너 사갑으로, 제방길을 따라 구만리로, 당고개를 넘어 도관리와 거주포로 그리고 내가 걸어내려 온 가사거리로 뻗어나가는 길들이 구름처럼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사방거리에는 정미소가 있다. 정미소 앞을 지나는 작은길이 있는데 주막집으로 가던 옛길이다. 고개 밑에 자리 잡은 주막은 늘 북적거렸다. 구만리 박영감도 주막을 거르지 않고 문현동 허영감도 들러 국밥에 막걸리를 시켰다. 그러다보니 어둑어둑해진다. 지금보다 더 삶에 부대꼈던 그 옛날 그 시절이지만, 마음에 담긴 달과 길과 물이 동행했던 인생여정을 흑백사진처럼 바라보는 것이다.
구만리 길과 다리를 건너 사갑을 지나 문현동으로 가는 길은 강과 함께 간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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