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는 산이 있고 강이 있다. ‘모든 경계엔 꽃이 핀다’고 말한 시인도 있지만 꽃이 피고지듯 흐르는 삶에는 경계가 없다. 나는 경계를 넘어간다. 물은 경계를 뭉개며 길을 연다. 이 작업은 소통의 시작이며 길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와야(瓦野)-기와를 굽던 마을이 들을 이루었다’는 곳이다. ‘안말’, ‘망전’, ‘비선동’, ‘도둔터’, ‘수작골’, ‘깨뜰’, ‘밤가시’, ‘폭포골’, ‘가령골’의 중심이었던 와야는 삼밭이며 호박 농사를 짓는 밭으로 바뀌었다. 그곳을 기와터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않다.
‘망전고개’를 돌아 와야로 들어선다. 예전에는 구비구비 돌아 오르막도 내리막도 있었던 고개지만 지금은 구비를 펴 낫처럼 휜 가파른 구비의 오르막만 있다. ‘망전고개’라고 하지만 일흔이 넘은 노인네들은 ‘뱀등고개’라고도 한다.
마을로 들어서자 노송의 그늘이 자리를 내준다. 성황당이 있었고 당산목이 자리를 하던 곳은 마을회관과 창고가 들어서있다. ‘모종안’은 소나무보대기(다박솔)가 밭을 이루어 모종을 심은듯하여 붙인 이름인데 지금은 노송이 푸른 춤사위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인다.
와야 ‘안말’로 들어서는 길은 산길을 오르는듯하다. ‘가령골’과 ‘수작골’ ‘연계동(염계동)’의 사이에 둔지를 이룬 비탈에 여기저기 집들이 자리한다. 화전을 터전으로 이룬 산골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논은 보이지 않고 밭에서는 호박을 따내느라 정신이 없다.
‘호박’은 한국인의 밥상에 자주 오르는 식품 중 하나이다. 가을의 보약하면 호박을 꼽을 수 있다. 못 생겼어도 맛과 영양이 풍부한 호박. 「본초강목」에 ‘호박은 속을 보하고 기를 높인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늙은 호박은 한방에서는 ‘남과(南瓜)’라고 하여 산후조리, 냉증, 감기, 중풍 등에 치료약으로 이용하였다. 호박에 들어있는 셀레늄은 정자 생산과 활동력을 증가시키고, 특히 비타민 A의 공급원인 베타카로틴은 암 발생을 억제하고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호박씨’는 불포화지방산이 주성분을 이루고, 단백질, 지방, 비타민 B1, 칼슘, 인의 함량이 뛰어나 혈액순환을 돕고 콜레스테롤을 낮춰주며 고혈압에도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
속담에 ‘호박씨 깐다’는 말이 있다. ‘뒤에서 실속만을 챙기는 사람이나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 몫만을 챙기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유래를 알면 먹을 게 없던 시절의 삶이라 씁쓸하다.
옛날 한 고을에 그저 책만 읽고 집안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는 가난한 선비가 살았다. 너무 가난하여 하루 한 끼의 식사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나 아내는 열심히 남편을 뒷바라지 하였다.
어느 날 남편이 잠깐 밖에 나간 사이 방 청소를 하던 아내는 방바닥에서 호박씨가 떨어져 있는것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얼른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때 남편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아내는 얼른 입에 넣었던 호박씨를 꺼내어 뒤로 감추었는데, 그것을 본 남편은 아내가 자기 몰래 음식을 먹다가 들킨 걸로 오해를 하고는 다그쳐 묻기를 ‘나 몰래 먹은 것이 무엇인지 내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할 수 없이 뒤에 감추었던 물건을 내놓았다. 그건 호박씨 하나였다. 남편 몰래 뒤에서 호박씨를 까먹으려고 했다는 데서 ‘뒤에서 호박씨를 깐다’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또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하는 속담은 뜻밖에 좋은 물건을 얻거나 행운을 만났다는 뜻이고, ‘호박 나물에 힘쓴다’는 속담은 ‘쓸데없는 일에 공연히 혼자 기를 쓰고 화를 내는 경우’나 ‘기골이 약한 사람이 가벼운 것을 들고도 쩔쩔 맬 때’를 말하는데 이처럼 호박은 우리 삶 속에서 친근한 먹거리가 되어 왔다.
와야 ‘안말’은 경계를 이루는 산들이 부채살처럼 에두른 한가운데 둔지를 이룬다. 그래서 골짜기도 많다. 둔지라고 하지만 펑퍼짐한 산등성이를 이룬 듯하다. 그 사이로 낮은 곳을 찾아 계곡처럼 흐르는 개울이 하나 있다. 골짜기마다 물이 지지하게 흐르기는 하나 강파르고 물살이 세서 곳곳에 연못이나 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가두고 농사에 이용한다.
그중 큰 물줄기는 ‘대밭골’에서 시작한다. 물을 따라 내려오면서 왼쪽골짜기는 ‘감자간’이고, 오른쪽 골은 ‘범말골’이다. 골이 느린 듯 길다하는 ‘느랏골’이 있고, 산신제를 드렸다는 ‘산지당골’도 있다. ▷수작골’로 넘어다녔다는 ‘작은입문골’은 ‘영시골’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들어선다. 숫돌을 캤다고하는 ‘숫돌골’은 동두골 왼쪽에 있다. ‘연계동골’과 ‘화재치골’은 안말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골이고, ‘난담골’, ‘구작골’을 지나 ‘가령골’로 넘나들었던 골짜기는 왼편으로 둘러선다.
난담골에서 가령골로 넘는 고개는 ‘원터고개’다. 지금은 산자락을 깎아 대토를 닦고 있고 오른쪽으로 삼밭이 있는데 밭을 갈다보면 기와가 나온다고 한다. 바로 여기가 기와를 굽던 자리 ‘와야’다.
안말 둔지에서 내려와 ‘모종안’에서 원터고개를 넘으려는데 손전화가 울린다. 점심을 먹으러 오라는 메시지다. 동창정보화마을의 안병관 선생님과 와야 삼거리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음날 와야로 다시 들어갔다.
가을햇살에 바싹 마른 들깨타작을 하느라고 며느리는 도리깨질을 하고 두 노인네는 들깨를 안아다 쌓고 있다. 타작마당으로 들어서자 며칠 전 안말에서 만났던 노인네는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잡는다. 한번 도리깨질을 하고 싶다고 하니 넘겨주신다. 개량 도리깨다. 옛날에는 물푸레나무로 채를 만들고 노간주나무로 장대를 만들었다. 한참 땀이 나도록 도리깨질을 한다.
일흔이 되도록 와야 안말에 살고 있다는 노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와야삼거리’를 마을사람들은 ‘벼락바위’라고 한다. 이곳에 벼락이 쳐 바위가 부서졌다고 한다. 그런데 바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가 그때 부서진 바위냐’고 여쭈니 ‘아니’라고 한다.
이정표의 바위는 ‘물안골 돌산’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돌산에는 자연동굴(고메굴)이 있어 한국전쟁때는 피란을 하기도 하였다는데 길이 나고 바위를 깨내면서 다 무너졌다고 한다.
삼거리에는 세모 모양의 바위에 현리, 갑둔리, 상남, 행치령 가는 길과 내면, 서석, 동창기미만세공원의 행선지가 적혀있다. 예전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주막거리를 이루던 곳이다. 이정표 건너편 배추밭이 바로 주막이 있었던 자리다. 조그만 마방도 함께 했다는데 주로 소장사꾼들의 쉼터가 되었다. 제법 큰 마방은 ‘원넘이골’과 ‘국골’ 사이에 있었다. 그때 그 모습 대로 길옆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령골’로 향했다.
가령골을 따라 크고 작은 골짜기들이 길과 맞닿아 있다.
‘가령골’은 ‘백암산’의 보물이다. 백암산은 홍천군 내촌면과 인제군 상남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099m이다. 남쪽으로는 응봉산(1,103m)이 멀리 북서쪽으로는 방태산(1,444m)이 마주한다. 자연림이 우거진 이곳은 생태체험 동호인들 사이에 잘 알려진 산이다. 봄에는 산나물을 뜯고 여름에는 야생화를 만나고 가을에는 온 산이 불붙듯 타오르는 단풍의 숲길을 걸으며 겨울에는 눈과 얼음이 빚어낸 백암의 자태에 흠뻑 젖는다.
정말 산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고 찾는 이들은 없을까? 봄이면 산나물꾼으로 여름이면 희귀 야생화 채취꾼으로 가을이면 도토리 약초꾼으로 겨울이면 겨우살이를 따는 벌목꾼으로 찾는 이들이 있어 산은 몸살을 앓는다.
산행은 ‘밤가시’에서 ‘폭포수-고메등-평풍바위-백암산-비레울’로 이어지거나 비레울에서 들머리를 잡아도 좋다. 밤나무가 많아 ‘밤가시골’이라고 하는 산 입구에는 수령이 300년 넘은 밤나무가 세 그루 있고, 밤꽃이 피는 6월경이면 꽃냄새가 온 사방에 퍼졌다고 하는데, 길을 내면서 사라졌다. 밤꽃에 어울리는 폭포소리의 진동을 느낄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저마다 가을을 맞은 나무들이 산행을 떠나는 길손들에게 울긋불긋 곱게 치장을 하고 마중을 나온듯하여 마냥 흐뭇하다.
백암산을 중심으로 하여 아홉싸리고개 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화채봉’이라 하고 왼쪽으로 뻗은 능선을 ‘고메등(곰의 등-고메등을 넘으면 황철골-광암리가 나온다)’이라고 한다.
‘가령골’은 와야에서 인제 ‘상남’으로 가는 ‘아홉싸리고개’를 이루는 깊은 골이다. 아홉싸리 고갯마루까지 오르기로 했다. 조선시대에 역이 있었다하여 ‘가역곡’이라 하다가 ‘가역골’ ‘개령골’ ‘가령골’로 불리는 마을이다.
‘진거리’를 지나 ‘원넘이골’을 지나자 길가에 맞닿은 집이 보인다. 대문을 들어서자 아주머니 한분은 고추를 따고 며느리인 듯한 아낙은 달롱(달래)을 다듬고 있다. 이곳이 ‘마방터’냐고 묻자 웃으면서 그렇다고 한다.
원래 이집은 마씨성을 가진 사람이 지었다고 하는데 이사를 가면서 ‘큰집골(가령폭포 윗골짜기)’에서 사시던 할아버지가 이사를 오셨다고 한다. 처음부터 마방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홉싸리고개를 넘나드는 소장사꾼들의 성화에 못이겨 하룻밤을 재워주었는데, 다음날 우전에서 소 값을 후하게 받게 된 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심때가 되자 주인아저씨가 들어오면서 ‘수작골’에서 농원을 하는 사장이 점심을 먹으러 온다며 차리라고 한다. 길가는 나그네도 배가 불러야 간다며 잡는다. 이웃에 사는 한분이 더 오고 밥상이 차려졌다.
인삼이나 불로초는 먹으면 좋고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밥과 된장, 김치는 안 먹으면 죽는다며 산촌의 삶을 들어낸다. 호박장국에 감자나물이 입맛을 되살려 낸다.
점심을 먹고 아홉싸리 고갯마루를 향하여 길을 나섰다.
밤가시를 지나자 ‘가령폭포길’과 폭포식당이 나온다. 한여름에는 폭포수를 맞으러 밤가시로 들어서서 노루길 같은 길을 따라 올라갔다고 한다. 지금은 가령폭포길이라는 이정표와 함께 포장이 되어있다. 비스듬히 굽은 고개를 넘어 올라가니 길도 물도 갈라진다. 갈림길에는 백암산 산행안내지도와 연화사 이정표가 서있다. 왼쪽으로는 ‘밤가시골’이고, 오른쪽으로는 ‘폭포수길’이다. 어느 길을 잡든 가령폭포와 백암산으로 갈 수 있다.
‘폭포수골’로 들어섰다. 이 골은 원래 ‘집골’이다. 포장을 하려는지 길이 넓게 닦여있다. 가령폭포를 오르다 보면 낙엽송 밭을 만나는데 화전민들이 다랑논을 일구어 붙이던 곳이다.
‘가령폭포(可靈瀑布)’는 ‘개령폭포(開靈瀑布)’라고도 부른다. 가령이란 이름보다 ‘영혼을 연다’는 뜻의 개령이란 이름에 더 마음이 간다. 연화사를 지나자 ‘작은 집골’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폭포수 안내판이 서있다. 능선을 돌아 올라서자 집채 만한 바위들이 계곡에 자리하고 진동항아리를 울리는 듯 물소리가 들려온다. 바위 틈새를 지나자 늙은 느릅나무 사이로 바위를 어르며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태풍 ‘갈매기’가 지나간 여름에 왔을 때는 비단을 풀어 내린 듯 물줄기가 장관이었다. 자연림의 울울창창한 숲에 둘러싸인 바위벼랑을 보란 듯 뛰어내리는 물줄기다.
가령폭포 위쪽은 ‘높은터’다. 자연림의 숲으로 우거진 이곳에서 한때 사람들이 살았다. 숲은 인간의 삶의 터전에 뿌리를 내렸다. 펑퍼짐한 둔지를 이룬 이곳에서 턱밑에 와닿은 백암산은 넓은 산자락을 펼쳐 보인다. 골짜기마다 물이 흘러들고 골짜기를 어우르는 ‘큰집골’의 막창은 진구렁을 이루고 있다.
내려오는 길은 ‘밤가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길도 없는 길을 따라 능선을 넘는다. 아마도 ‘작은집골’ 능선인 듯하다. 능선에서 골짜기로 내려섰다. 심을 캤다하여 붙여진 ‘심바우골’이다. 심바우골에는 유난히 흰빛이 나는 ‘신바우’가 있다.
물줄기를 따라 트래킹을 하듯 내려오자 고메등쪽에서 내려오는 ‘다락골’과 마주친다. 이 길은 고메등으로 오르는 등산로다. 물이 흐르는 대로 계곡은 작은 폭포와 소를 만들기도 한다. ‘큰사태울’을 지나고 ‘작은사태울’을 지나 ‘작은밤가시골’ 어귀에 이르자 집들이 보인다. 심바위골에서 흘러온 물줄기와 가령폭포위 높은터 큰집골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한몸을 이루며 빠져나간다.
다시 국도로 나와 고갯마루를 향해 걷는다.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이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오른쪽으로 다랑구지 논마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다리를 건너 왼편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는 ‘감자간’이다. 와야 안말의 ‘감자간’으로 넘나들던 길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백암산 들머리인 ‘비레울 골짜기’가 나온다.
비레울 어귀에서 사진을 찍는데 서늘한 바람이 물과 함께 불어온다. 신갈나무, 신나무, 물푸레나무, 소나무가 우거진 계곡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화면을 넘어 내 가슴 가득 붉게 물든다.
산행 길을 따라 어사리덕까지 오르기로 했다. 이곳을 다녀간 산악회의 리본이 나무마다 걸려있다. 길은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합수머리에서 오른쪽 계곡을 따라 오른다. 구절초가 한껏 고개를 치켜든다. 뒤늦게 핀 물봉선화도 벌을 맞아들이기에 바쁘다.
계곡을 벗어나 능선으로 올라서자 낙엽송 밭(일본 이깔나무)이 이어진다. 이곳에 낙엽송이 자생할리는 없다. 한때 화전민들이 떠나면서 심은 나무들이다. 비레울의 물줄기는 ‘어사리덕’으로 향하고 개울을 건너 평원 같은 낙엽송 밭을 지나면 가령폭포를 지나 높은터를 가로지르는 등산로와 만난다. 일명 ‘삼각점’이다. 나는 웃통을 벗고 산죽이 군락을 이룬 숲을 가로질러 ‘어사리덕’으로 올라가 심심산천의 약수를 마시고 돌아서기로 했다.
올라올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내려가는 동안 많이 만났다.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이다. 비레울을 나와 다시 아홉싸리 고갯마루로 향했다.
아홉싸리고개에는 전설이 전해진다. 혼례만을 치룬 새신랑이 3일째 되는 날, 아흔아홉구비 도로개설공사에 끌려가 날짜가 가는 것도 모르고 일만 하다 공사가 다 끝나고 돌아오니 태어난 아들이 아홉살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갯마루에는 쉼터가 있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차를 끓이며 국수를 삶는다.
해는 이미 저물고 산마루와 맞닿은 하늘가에 붉은 노을을 길게 펼쳐 놓는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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