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터’ 어귀에서 둑방 길을 따라 걸으며 산을 바라본다. 멀리서 바라보니 표정을 느낄 수 있다. 서로 닮은 산과 강이 부여안고 흐른다. 저만큼 살다보면 닮고도 남겠다.
강 건너 ‘망재봉’과 ‘동막골’-‘탑둔지’-‘동창’-‘복골’로 이어지는 은장봉의 능선은 선녀가 벗어놓은 치마처럼 부드럽고, 동호골-가루개고개-척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화가 잔뜩 난 개구쟁이의 표정이다.
장수원- 원이 있었던 마을인가? 어떤 자료에도 원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원으로써의 구실을 했다는 것을 추정할만한 근거는 있다. 우선 동창을 들 수 있다. 홍천의 동쪽에 동창이 있었다는 기록에서 그곳이 지금의 동창인지 장수원인지는 분명치 않다. ‘장수원’에도 ‘대동미수집창고’가 있었다. 지금의 방앗간 자리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의 동창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당시 ‘장수원’은 교통의 중심지였다. 주막도 북적거렸고 마방도 컸다. 따라서 양조장도 들어서게 된다. 양조장터는 지금 장수원 방앗간 자리다.
‘장수원’ 뒤 산봉우리를 ‘왜갈봉’이라 한다. 왜가리가 많이 날아와 앉았다고 한다. 동창의 남산과 왜갈봉이 경계를 이루는 골은 조상골이다. 서리가 일찍 내려 붙여졌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골이 깊다. ‘진고개’를 넘어 수하리로 갈수 있었다. 또한 새말(신촌)의 ‘석장골’이나 ‘닥밭골’로도 이어진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논에서는 벼 베기가 한창이다. 왜갈봉 아래 터를 잡은 장수원은 고요하고 조용하다. 한때 대동미 창고가 있었고, 술 맛 좋은 양조장과 마방과 이층집주막(지금의 은하가든)이 있었던 풍경이 우사와 식당과 오이밭으로 오버랩 되며 눈앞에 나타난다.
흘러간 강물처럼 추억만이 머릿속을 맴돈다. 몰라보게 변했다는 풍경 앞에서 그리움은 얼마만큼 진한 추억을 떠올려야 할까?
동창과 장수원을 잇는 다리는 하나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서가터’ 앞 섶다리를 건너다녔다고 한다. 즉 그만큼 왕래가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왜갈봉 앞으로 펼쳐진 장수원 앞뜰은 넓다. 강가 농막에서는 노인들이 앉아 콤바인더로 벼 베는 풍경을 지켜보고 있다. 너른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들이 바람에 출렁인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에 누룽지 냄새가 배어있다.
농막너머는 ‘당재소’다. 용호터-벼락구미-삼형제소-평붕소를 지나는 강물이 당재봉 아래 이룬 소다. 다리를 건너면 감두리다. 귀미터고개 마루에서 이어져 내려온 능선이 ‘당재봉’을 일으켜 세우고, 앞쪽으로 감두리 둔덕을 이룬다.
강물이 휘감고 돈다하여 감두리라 한다. ‘감두리’에서 강 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산은 촉새봉의 줄기다. ‘횟골’과 ‘말구리’에서 흐르는 물이 감두리로 흘러든다. ‘말구리’를 넘어 비선동으로 오가던 길도 숲으로 우거져 보이지 않는다.
감두리에는 ‘구유소’가 있다. 장어도 잡고 자라도 잡고 메기낚시를 하던 기억을 박하사탕처럼 사람들은 아직도 기억한다.
동창에서 귀미터고개를 넘으면 큰구둔치고개 새말 점말 장수원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난다. 귀미터 고개가 뚫리기 전에는 ‘당재봉’을 끼고 돌아다녔다.
장수원 앞뜰의 강뚝을 따라 나와 큰길에서 주막거리 터로 올라간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주막거리와 마방터는 창고와 식당이 들어서있다. 그 사이로 양조장 대동미창고로 가는 샛길이 있다.
샛길어귀에는 비각과 선덕비가 있다. 변씨 문중의 ‘효자각’인데 비는 없다. 그 옆에 ‘구장 변덕오 선덕비’가 서있다. 장수원의 갑부이며 양조장과 주막을 했던 변덕오씨의 선행을 기리는 비다.
나는 이름이 예쁜 ‘소동개울’을 따라 ‘장지골’로 올라갔다. 장수원을 지나 점말을 지나 구둔치로 오르기 전 오른쪽으로 들어서는 골이다. ‘장지골’을 지금은 새말(신촌)이라고 부른다. 장지골에 원래부터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지금은 금광 때문에 찾아들어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새말’이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떠돌이일수도 있고 금맥을 찾아 나선 사람들일수도 있고 첩첩산중에 화전을 일구어 끼니를 이어가려고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다.
새말어귀에 서면 ‘촉새봉’에서 뻗어 내린 골이 한눈에 보인다. 골이 참 많다. 촉새봉 오른쪽 능선마루에는 장평으로 이어지는 비행기재가 있다. 장야촌(장평)에서 패한 동학군이 넘기도 했던 고개다. 한때 홍천에서 내촌 가는 버스를 타고 하늘과 맞닿은 비행기재를 넘어야 했다. 또한 6·25전쟁때 격전의 현장이기도 했다.
겨우 차 한 대가 지나다닐 정도의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개울에 모여드는 골짜기의 물소리는 여린 랩소디 같다.
‘공가지골’, ‘몽돌말’, ‘골말’의 물줄기가 합쳐 ‘장지골’을 흘러내리다가 ‘큰구둔치’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쳐 ‘소동개울’을 이룬다.
새말에서 두어 구비를 돌면 ‘신촌분교’터가 나온다. 지금은 페허가 된, 거기가 학교였는지 기억에도 없는 자리. 그러나 이 학교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고장의 풍습과 삶의 방식을 잊지 않는다. 지금쯤 가을 운동회가 열리던 그 운동장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외치는 응원 함성으로 가득했으리라. 그 때 남은 함성이 울타리처럼 서있는 나무들의 푸른 잎새에 스며들어 자라나 숲이 되었다. 이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점말에서 조룬 새말에 살았다. 그때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하루하루 였으리라.
그들의 일터가 ‘닥밭골’이다. 닥나무가 많아 붙여진 골에서 종이를 만들어 실어 날랐다. 조상골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물걸리장으로 가고 큰 구둔치를 넘어 서석장을 다녔다. 더러는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더러는 ‘석장골’로 들어가 금을 캤다.
물걸리에 사람이 들어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금광개발이었다. ‘갈현동(가루개고개)’의 ‘지당골’과 새말의 ‘석장골’ 금광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금맥이 많았는지 굴도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노다지를 만났다는 사람은 듣지 못했다.
조룬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큰구둔치’에서 내려오다가 왼쪽으로 들어가는 골이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두 개의 큰골이 나온다. 왼쪽 골은 ‘솔치골’이고 오른쪽 골은 ‘조룬’이다.
솔치골 어귀에는 큰 농장이 있다. 기척소리에 소들이 일어나 숨을 내뿜는다. 솔치골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 일개 사단이 몰살당한 ‘애막골’과 덕밭재가 있다. 덕밭재는 흔한 지명인데, 펑퍼짐한 둔덕과 고개를 이룬 곳을 그렇게 불렀다.
‘조룬’으로 들어섰다. 아침이면 안개가 많다 하여 ‘조운(朝雲)’이라 이름 하였다. 구비를 돌아서니 산들이 에둘러 선다. ‘촉새봉’에서 이어지는 능선이다. 그 중 높은 봉우리인 ‘더렁봉’에서 ‘연목골’과 ‘절더렁봉’이 이어져 내리고 도로공사중인 ‘된재’와 ‘수반’골이 부채살처럼 들어난다.
골마다 붙은 이름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모두가 그렇게 불러왔을 뿐, 더 이상 가르쳐주지도, 알려고도, 알 필요도 없이 살았는데 문득 할아버지가 나무하러가고 할머니가 나물 뜯으러가고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묻고 그 옆에 할머니를 묻고 이제 아버지를 그 골에 모시며 아이들에게 그냥 이름만 전해주며 너도 그렇게 불러라 이르렀을 뿐 알 수 없다.
‘조룬’에서 나와 ‘점말’을 지난다. ‘점말’은 옹기를 굽던 마을이다. ‘된재’로 오르는 길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룬다. ‘점말’에 사람들이 들어온 데는 아픈 사연이 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조선 ‘정조’ 때 명나라에서 ‘이수광’이 <천주실의>라는 책을 가져오면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되다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모든 사람은 양반도 상민도 천민도 없이 다같이 평등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상민, 부녀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유교 사회 질서인 남녀 차별과 제사 의식을 금지하는 등 성리학 중심의 사회 질서를 부정하였다.
정조 때에는 박해가 심하지 않았으나 순조 때에는 황사영이 프랑스에 군대 동원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나라에서는 천주교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려 천주교를 믿고 있던 수백 명의 신도들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천주교 신도들이 언제 어디서 ‘점말’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에 갑자기 들어 온 그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궁여지책으로 그들은 옹기를 구워 팔아 생을 이어갔다. 이들은 ‘동막골’과 ‘탑둔지’ 근처에서 흙을 파서 이곳으로 가져와 옹기를 구웠다. 그들의 믿음이 하늘에 닿았을까? 차츰 자리를 잡으면서 기도하고 포교하면서 성당도 지었다. 지금도 ‘물걸리공소’가 ‘점말’에 있어 주말이면 모여 예배를 드린다.
‘점말’에서 ‘된재’로 넘는 길에는 ‘신복골’이 있다. 아마도 천주교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점말’에서 ‘장수원’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더렁골’, ‘망태골’, ‘능골’, ‘등대골’ 등 크고 작은 ‘홀태(물이 흐르지 않고 이름이 없는 골짜기)’가 있다.

장수원 이층집 주막이 그립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가 자주 찾던 술집은 이층 주막집
창문너머 갈보가 소동개울 바라보며 물소리 같은 사랑가 부를 때
몸 속 어딘가 슴벅하게 여전히 졌고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
개다리소반에 열무김치와 간장 한 종지
대접 한 가득 올챙이국수와 막걸리 한 사발
끊어지듯 엉기어 후루룩 후루룩 마시듯 넘어가는
이 맛에
먼 길도 접어두고 오래도록 멍석에 앉아
흘깃 흘깃 마주치는 치맛자락 같은
뭉게구름을 바라보다가
중심을 놓고 날아가는 잠자리처럼
다시, 길을 나설 때
기억하라는 듯 손금에 남아 있는 살의 온기여

- 주막 -

이제 ‘장수원’ 주막이 있었던 식당에 와 밥을 주문한다.
“주모,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대접 주소”
식당 주인이 빙긋이 웃는다. 말을 받아주고 웃어 줄줄 아는 마음이 한결 푸근하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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