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둔지’는 절이 있던 자리다. 동창초등학교 옆 대승사(大乘寺)라는 간판을 따라 올라가니 작은 절이 나온다. 뒷둔덕을 넘어갈 수도 있지만 다시 내려와 ‘기미만세상’을 지나 비석들이 나란히 서있는 길을 따라 올라갔다. 한쪽으로는 ‘복골’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다리가 놓여있다.
농가 텃밭에선 창 넓은 모자를 쓴 아낙이 참깨를 베어묶어 세우고 있다. 농가 앞을 지나자 안내판과 낮은 철담 안으로 삼층석탑, 은행나무, 보호각이 눈에 들어온다. 잔디대신 방석처럼 깔려있는 토끼풀위로 바람이 불어온다.
탑둔지의 중심은 어디일까? 삼층석탑 앞에 서니 ‘은장봉’이 광배처럼 둘러선다. 은장봉을 바라보며 둔덕에 올라서니 동창 뜰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이 금강터였구나. 어떤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마을 이름을 따 ‘물걸리 절터’라고 부르는 탑둔지.
이곳은 홍양사(洪陽寺)였다는 주장도 있다. 2003년 발굴을 마친 국립 춘천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찾지 못해 그 이름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잠정 결론짓는다. 더구나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책에도 그 이름이 나오지 않아 더욱 알 수 없다.
다만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 유물만은 풍부하고 아름답다. 1967년 4월에 한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1점, 고려시대 철불 파편(鐵佛破片) 4점, 철쇄(鐵鎖) 파편 2점, 암막새 4점, 수키와파편 6점, 암키와파편 6점, 청자 파편 4점, 토기(土器) 파편 5점, 조선시대 백자 파편 7점 등이 발견되었다.
1971년 7월에 조사에서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보물 제542호), 대좌<臺座>(보물 제543호), 대좌 및 광배<光背>(보물 제544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545호) 등이 발견되어 현지에 지정·보존되어 있다.
그로 미루어 사격(寺格)을 가늠할 수 있으며 그 규모가 홍천 일대에서는 가장 두드러진 곳이었다고 짐작 할 뿐이다.
발굴조사로 밝혀진 것은 절터의 금당은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일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모두 세분의 부처님을 모셨으며 남향으로 자리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지금 남아 있는 비로자나불이 주존불이었으며 그 왼쪽의 석조여래가 협시, 오른쪽의 부러진 광배가 놓인 곳에는 석불이 아닌 철불(鐵佛)이 협시로 놓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는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 당시 깨진 석불편을 찾지 못하고 다량의 철불편이 나온 것에 근거한다.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유물로는 보물 545호인 삼층석탑, 보물 544호인 불대좌 및 광배, 보물 543호인 불대좌와 부러진 광배, 보물 542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541호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그 외 절터 마당에 팔각의 석불대좌가 있으며 장대석과 주춧돌 그리고 와편들을 모아 놓았다. 이들 모두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조각 양식을 지녔다.
은행나무 뒤편 금당 터에 모아놓은 주춧돌과 장대석 그리고 팔각의 석불대좌와 기와더미에는 이끼가 뿌리를 내려 생을 이어가고 막자란 들풀들이 꽃을 피우고 씨를 맺고 있고, 그 중 팔각의 석불대좌에는 양각된 사자들이 들어앉아 무거운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기의 전형적인 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그저 소박한 모습 그대로다.
두개의 바깥기둥과 하나의 안기둥으로 세운 기단은 대범하지 못하고 얹힌 갑석 역시 충분히 여유롭지 못하다. 1층 몸돌에 비해 그 위의 몸돌 크기가 축약이 심하고 지붕돌의 층급받침도 5단으로 되었다가 3층 지붕돌은 어쩐 일인지 4단으로 축약되어 있다. 게다가 상륜부도 노반만 남아 전체적으로는 불완전한 구조를 보여준다. 그 뒤로 은행나무가 서있고 한자리에 모아놓은 석물들이 한자리 한다.
부처님의 대좌로 여겨지는 돌덩이에 사자들이 새겨진 팔각의 석불대좌에 걸터앉아 전각 안 맨 왼쪽에 놓인 불대좌와 광배를 바라본다. 만행 중인 부처님을 기다리는 듯 비어있다. 아니 비어있어 더 환하다. 완전하게 갖춘 것은 오히려 부족한 듯 보이나(大成若缺), 그의 효용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다(其用不)고 한 것처럼 부처님은 계시지 않는데 계신 것보다 더 꽉 차 보이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광배는 한 조각의 배에 비유하지만 이곳의 광배는 부처님께 헌화하다 떨어져 나온 한 잎의 연꽃 같다. 두광과 신광이 뚜렷이 구분되고 두광 중심은 활짝 핀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안쪽에는 넝쿨무늬, 바깥에는 불꽃 무늬를 새겼고 광배 가장자리 아홉 곳에는 화불을 조각하였는데 수인 즉, 손의 모양이 모두 다르다. 대좌의 하대석 아랫부분에는 안상이 음각되어 있고 그 위에 새겨진 복련과 귀꽃은 굴곡이 깊고 풍만하다. 귀꽃은 충분히 도드라져 화려함을 더하고 그 모양도 부처님을 닮았다. 팔면의 중대석마다 감실처럼 돌의 표면을 파내고 신장이나 보살상을 새겨 놓았다. 중대석에는 신장상과 불보살이 어우러졌으며 복련의 하대석에는 귀꽃들이 아름답게 피었다.
그 옆에 석조여래좌상이 법의를 통견으로 걸치고 앉아 계시지만 상호와 나발은 알아보기 힘들만큼 상했다. 부처님은 그래도 가부좌를 틀고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꼿꼿이 앉아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부서진 얼굴로도 깨달음의 자세를 잃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머리에는 달팽이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것 같으며,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표현이 분명하지 않다. 옷은 양 어깨에 걸치고 있고, 가슴에는 띠 모양의 매듭이 보인다. 어깨는 둥글지만 두껍고 투박하게 보이고, 상체는 평면적이고 왜소한 편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분된 8각형으로 하대에는 각 면마다 무늬가 있고, 향로와 상상의 새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8각의 각 면에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고, 상대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석조여래좌상 옆에 석조비로사나불좌상(보물 542호=비로자나불, Vairocana)은 인자하지만 머리가 상대적으로 큰 투박한 모습이다. 불교의 지혜로움과 그 망망한 바다의 광대무변을 상징하는 비로사나불은 태양을 상징한다.
비로사나불은 수인을 통해 알 수 있다. 손의 모양은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서 오른손 엄지가 왼손 검지 끝에 서로 맞닿은 모양이다.
그런데 물걸리의 석조비로사나불은 왼손 엄지가 오른손의 검지를 싸고 있는 모습을 취하고 있어 손의 모양이 바뀌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불상의 발 모양도 보통은 오른발을 위로 한 자세인 길상좌(吉祥坐)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왼발을 위로 올린 항마좌(降魔坐)를 취하고 있다.
맨 오른쪽에는 물걸리 불대좌(보물 543호)가 놓여있다. 뒤의 광배는 깨어지고 마모가 심한 반면 불대좌의 모습은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좌의 중대석에는 팔부중이 각 면에 새겨져 있고 하대석에는 안성을 파고 그 속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다.
다 둘러보고 보호각 뒤로 이어지는 둔덕으로 올랐다. 인삼과 곡식들이 여물고 있다. 밭둑서리서 내려다보니 보물관리가 허술해 보인다. 우선 지붕과 화장실과 녹슨 철책과 안내판에서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를 보는듯하다.
밭둑서리를 지나 둔덕을 넘었다. 대승사 앞에서 합장을 하고 나온다. 동막골이다. 그 안쪽 산기슭에는 부장두 전성렬이 잠들어 있다.
동막골에는 질 좋은 옹기 흙이 나온다. 한때 이곳에서 항아리를 빚기도 했다고 한다. 이 흙은 ‘점말’ 사람들이 많이 파다가 옹기를 빚었다. ‘점말’은 천주교 탄압으로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자리 잡은 마을이다. 지금도 물걸리 천주교 공소가 있다.
길을 따라 내려오니 동창초등학교 앞이다. 울타리와 교문에 걸려있는 현수막에서 학교 통페합의 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래로는 당재봉과 ‘귀미터고개’가 보인다. 마을에서는 ‘귀미’라고 하는데 물이 굽이쳐 후미를 이룬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예전에는 이곳으로 물이 휘돌아나갔다는 이야긴데 지금은 둑을 막아 너른 뜰을 이루고 있다.
동창에는 ‘억장군’이라는 사람도 살았다. 텃세가 세기로 소문난 채씨 문중의 주먹꾼이었다 한다.
동창의 중심인 동창기미만세공원에는 팔열사를 추모하기위한 비와 팔렬각, 광장 그리고 계단위에 터를 닦고 세운 기미만세동상이 서있고 한구석에 비석거리에 흩어졌던 비들을 모아 세워놓았다. 팔렬각은 1963년 마을주민과 홍천군에서 건립하였으나 낡고 초라하여 1990년 기미만세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군민의 성금과 군비 그리고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다시 세우고 아울러 ‘기미만세상’도 세웠다.
‘기미만세상’은 애국충절의 높은 뜻을 담은 구열사의 인물이 조형되어 있다. 다리 건너 마방터에는 마방은 없고, 마방을 중심으로 한 김덕원 의사의 애국충철을 담은 기적비, 시비, 마방터 표식과 동창만세운동의 약사를 새긴 표석들이 둘러서 있다.
복골 개울을 따라 강으로 이어지는 길은 풀이 우거져 있다. 당시의 주막거리와 장마당을 생각하며 걷는다. 강까지 가려면 동창뜰을 지나야 한다.
강둑에 올라서니 ‘남산’ 골짜기가 훤히 보인다. 마을에서는 산신제를 ‘지당골’에서 올렸다. 지당골은 ‘삼형제소’ 아래쪽 골이다. 골막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고 굿터가 있었다. 당목이었던 소나무는 명을 다해 둥치만 서있다.
삼형제소에는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오랜 옛날 지금의 삼형제소 뒤로는 바위가 병풍을 이룬 험한 산이었는데 강 건너에서 물속을 바라보면 바위벼랑에서 자라는 산삼이 물에 비췄다고 한다. 이 마을에 세 아들을 둔 아비가 병이 깊어 자리에 누웠는데 팔방으로 약을 구하던 중 이 소문을 듣고 강가에 나가 물속을 들여다보니 정말 산삼이 물에 비추는 것이었다. 세 형제 중 맏이와 둘째가 바위벼랑으로 올라가 산삼을 찾았으나 못 찾고 막내가 올라가게 되었다. 산삼을 찾아 바위벼랑을 오르던 막내는 벼랑 끝에 자라난 산삼을 발견했다. 막내는 조심조심 기어가 산삼을 캤다. 그 순간 바위덩어리가 떨어지고 막내도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손에 쥐고 있던 산삼을 먹고 아버지의 병환은 낳았다. 그 후 강 한가운데 떨어져 내린 바위를 효성이 지극한 삼형제바위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큰물이 나가도 그 바위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삼형제소 아래는 ‘평풍소’다. 그 아래는 석가터(서가터)라고 한다. 일설에 부처가 나왔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예전에는 ‘장수원’으로 건너다니던 섶다리가 놓였던 곳이다.
물 한가운데서 누군가 파리 낚시를 한다. 구경할 겸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물에 들어섰다. 훌훌 옷을 벗어던지고 멱이나 감을까? 아 가을이 오는 길목이라 서늘함이 느껴진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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