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고 홍천에서 벌이는 축제가 계속 이어진다. 한우인의날 행사와 너브내 단호박축제, 강원인삼축제, 사랑말축제 그리고 한서제다. 짧은 시간에 다섯개의 행사를 찾아 즐기는 일 또한 벅차다.
주말에는 단호박축제 구경을 다녀왔다. 면단위에서 벌이는 먹거리 축제로써 올해로 두번째이다.
행사장에는 볼거리뿐만 아니라 즐길거리와 머물거리가 다양하였다. 특히 올해는 호박왕 선발대회를 열어 작목반원들이 참여도를 높였고, 호박요리, 호박 조각품만들기, 호박탑쌓기등 너브내호박을 브랜드화하는데 자리매김하였다고 생각한다.
점심을 먹고 ‘항골’로 향했다. 항골은 강을 중심으로 ‘양지 항골’과 ‘음지 항골’로 나뉜다. 행치령에서 내려오는 길은 양지항골을 거쳐 ‘작은 구둔치(항골고개)’를 넘어 서석으로 이어진다.
나는 작은 구둔치 정상에까지 올랐다가 되돌아 내려오기로 했다. 촉새봉과 뾰죽봉 사이를 있는 능선에 있는 ‘큰 구둔치’, ‘작은 구둔치고개’.
작은 구둔치는 ‘생베’에서 ‘항골 응달말’로 넘는 고개다. 구비도 없이 긴 내리막이다. 개가 목을 길게 늘어뜨린 형상이라 ‘구둔치’라 한다. 큰 구둔치고개는 물걸리 장지골(새말)로 이어진다.
작은 구둔치 정상에서 내려오다가 오른편쪽으로 갓장골이 있다. 풀이 우거져 골안은 잘 보이지 않지만 추석에 조상의 묘를 찾은 성묘객들의 발길에 난 공동묘지로 가는 길이 보였다.
작은 구둔치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에 큰 다리가 있고 다리를 앞두고 샛길로 빠져 응달말과 진고개로 가는 길이 있다. 마을의 노인들을 찾아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듣다가 ‘김덕원 의사(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생, 1876년 11월26일~1943년 11월 ? : 1919년 4월3일 동창 만세운동을 주도. 1992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포상 추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물안골’에서 ‘응달말’로 들어서는 첫 번째 집은 ‘김덕원 의사’가 초가를 짓고 살았던 집이다. 지금은 주인도 바뀌고 집도 새로 짓고 소와 채소를 재배하는 농부가 살고 있다.
‘김덕원 의사’는 1923년경 왜경에 체포되어 춘천형무소에서 4년의 옥고를 치른다. 그 후 이곳으로 이사를 와 산 밑 움막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아들들이 집을 다시 지어 함께 살다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고 갓장골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의사의 묘지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농로를 따라 응달말로 들어서서 세 번째 집은 ‘김덕원 의사의 고모네 집’이다. 이곳에서 양조장을 했던 고모는 피신을 온 김덕원 의사를 숨겨주기도 했다. 길은 오른쪽으로 휘어져 산 밑을 돌아 쇠두렝이소(굴바위소)로 향한다.
다시 돌아 나왔다. 다리 밑을 빠져나오니 ‘앙천루’라는 표지석이 서 있고, 구둔치 고개로 오르는 나들목 옆에 비석과 사당이 서있다.
일단 강파른 ‘앙천봉’ 길은 뒤로 미루고 사당을 둘러보았다. 사당은 제주 고씨의 숭모각이고 그 옆에 세워진 비는 ‘탄타선생고공경주추모비’이다.
선생은 항골 강가에 초가집을 짓고 아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신 훈장이다. 제자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이들이 여기에 추모비를 세운 까닭은 자주 이곳 ‘물안골등(지금의 앙천루)’에 올라 호연지기를 길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생이 살던 집은 다리 건너 항곡(항골) 강가에 지금도 있고, 후손들은 산 밑에 다시 집을 짓고 살고 있다.
‘항곡’을 마을에서는 ‘황골’이라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데는 ‘황새재’에서 온 듯하다. ‘황새재’는 ‘수하’에서 ‘용호터’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가 험하고 강파르지만 질러가는 길이다.
‘황새재’는 황새가 많이 날아와 붙여진 이름인데 원래는 ‘항서재’였다. 용호터에 있던 관군이 ‘구둔치’에 있던 청군(왜군?)에게 항서(降書)를 가지고 넘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마을에서는 이 이름이 맘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황새들이 많이 날아와 집을 짓는 걸 보고 ‘황새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마을 또한 ‘황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글픈 역사를 가진 이름 ‘항골’을 ‘황골’로 바꾸어 부른다고 하여 아픔이 사라질까?
역사란 땅이 알고 하늘이 알고 강이 알고 나무와 풀이 아는 기록이다.
항서재는 항골에서 산 밑을 따라 내려가다가 등강을 넘게 되는데 지금은 사람 다닌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길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토끼길 같은 흔적이 있다. 그 길이 수하리에서 용호터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항골은 강을 중심으로 항곡분교가 있는 곳은 ‘양지 항골’이고, ‘굴바위소’ 아래 뜰은 ‘음지 항골’이다.
서석초등학교항곡분교 입구에서 네 시 방향의 산위를 바라보면 소나무에 휩싸인 아담한 누각이 보인다. ‘작은 물안골’ 등에 선 ‘앙천루’다.
다시 다리를 건너 탄타선생 추모비 앞에서 돌아내려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옆에는 물안골 민박이 있다.
누각으로 오른다. 왼편에 ‘앙천루’ 표석이, 오른편에 ‘앙천봉길’의 표석이 있다. 산을 깎아 내고 시멘트 포장을 했다. 연산홍을 심어 단장을 하고 그 사이 소나무와 신갈나무가 농익은 성하의 푸르름을 내뿜고 있다. 강파르다. 올라가니 숨이 차다. 작은 봉우리를 정지하여 누각을 세웠다. 그리고 주위에 시문을 새긴 비를 세웠다.
‘앙천(仰天)’이란 하늘을 우러른다는 뜻이다. ‘물안골 등’이 ‘앙천봉’이란 이름을 갖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앙천루를 짓고 부터이다. 김덕원 의사가 이곳에 올라 하늘에 탄식하고 국권회복을 호소하였다 하여 누각을 짓고 성역화한 이후다.
‘앙천대소’하며 휘 둘러보고 길을 내려와 진고개로 들어선다. 응달말에서 바위벼랑의 산 밑을 돌아가는 길이다. 이 길은 불과 몇 년 전 만 해도 바위벼랑과 강이 잘 어울려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수하리 강변의 중심이었다. 특히 ‘부처소’는 계절마다 눈길을 끄는 명소였다. 특히 화가들의 시선을 끌었다. ‘물안골’ 등에서 이어지는 단애(斷崖)와 수반에 담긴 듯 한 바위, 그리고 넓고 깨끗한 백사장은 휴양지로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부처소’는 부처를 닮은 바위에서 생긴 이름이다.
최근에 응달말에서 용호대를 잇는 2차선 도로가 뚫리면서 ‘물안골등(앙천봉)’에서 이어지는 바위벼랑과 꼭 부처를 닮은 바위는 사라진 것이다. 또한 ‘부처소’ 아래 여울에 널려있던 선녀의 비단치마주름 같던 하얀 바위도 사라졌다.
‘애호박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서있는 마을이 진고개다. ‘진고개’는 마을지명이자 고개다. 고개는 수하리 ‘고무래골’에서 내촌면 ‘조상골’로 간다. 옛날에는 진고개 마을에서 물걸리를 가려면 ‘진고개’를 넘든가 돌아 나와 ‘항서재’를 넘어야했다. 오지였다. 그런데 구둔치 고개 밑에서 ‘부처소-진고개-용호터-벼락바위-동창 기미만세공원’으로 가는 길이 확포장 되고 다리가 놓이면서 정말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곳이다. 그럴만한 이유는 꼭 있을 것이다.
저녁햇살이 밝게 비추는 서향의 마을 진고개 앞강에는 안개가 피어올랐다. 마을로 들어서자 빨간 지붕이 이색적이다. 농로 같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산 밑 쪽 ‘웃말’에는 농가와 펜션이 들어서 있고 아랫말은 너른 버덩이다. 웃말 펜션을 지나 경계를 이루는 듯한 깊은 골짜기는 삿골(사잇골, 삭골)이다.
삿골은 정말 골이 깊은데 막치에서 능선을 넘으면 큰 구둔치가 나온다. 삿골 어귀를 지나면 ‘고무래골’이다. 골짜기 능선을 넘으면 ‘조상골’과 ‘닥밭골(물걸리 새말)’이 나오는데 이 고개가 ‘진고개’다.
‘부처소’를 지나온 강은 너른 버덩을 돌아 산 밑으로 구비 친다. 저녁놀도 하늘가 산마루에 걸리고 어둑어둑해졌다. 갑자기 밤낚시가 하고 싶어졌다. 두엄더미를 헤쳐 지렁이를 잡아 바위 위에 앉아 낚싯대를 폈다. 투두둑 손에 전해지는 물속의 움직임이 세차다. 휘익 낚싯대를 챘다. 불개리다. 피라미의 수컷을 부르는 사투리다. 다시 낚싯대를 물속에 던졌다. 물 듯 물 듯 약하게 떨림이 전해진다. 뭘까? 휘익 낚시에 걸려 나온 고기는 납자루다. 다시 낚싯대를 드리운다. 투둑 투두둑.
밤에 듣는 물소리는 적막하다. 밤새 물결처럼 뒤척이며 잠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고개를 넘어 용호대로 들어섰다. 항골에서 용호대로 넘는 새로 난 고개인데 아직 이름이 없다. 고개를 넘자마자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로 들어섰다. 농가를 지나고 길은 강으로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편에 동민기념관이 있다. 조경수로 심은 나무들이 더러는 붉게 말라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기념관 입구에 돌 거북이가 서있고 여기저기 비석이 널려있다. 주변이 어수선한걸보니 아직 개관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왼편 산 밑에는 ‘김덕원 의사’가 숨어 지냈다는 다락방이다. 일명 도깨비 집이다. 다락방치고 너무 호화스럽다. 당시의 다락방은 방이라기보다 광이었다.
김덕원 의사가 피신해 있던 집은 ‘연규환’씨가 살던 집이었다. 산 밑에 외따로 지은 초가집에 딸린 다락에서 밤에는 들어와 잠을 자고 낮에는 굴(‘보’ 아구에서 산 쪽으로 난 바위굴-강물이 돌아 흘러 밖에서는 잘 안 보인다. 지금은 무너져 굴인지 모를 정도다)속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1919년 4월3일 만세운동이후 ‘김덕원’을 체포하려는 왜경뿐만 아니라 독립만세운동 시위도중 피해를 입은 마을사람들의 눈도 피해 다녀야 했다.
하루는 다락에 숨어있는데 마을 아낙네들이 마실을 와 놀다가 다락방에서 부시럭대는 소리가 난다고 하자 안주인이 ‘가끔씩 도깨비가 나온다’고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후로 이 집은 ‘도깨비집’이 되었다고 한다.
기념관문은 걸려있고 도로변의 잡풀을 깎는 엔진소리만 요란하다. 비에 씻겨 내려간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다. 마당 끝 수로에는 물이 가득 내려간다. 이 수로의 아구는 ‘말등소’아래 보에서 흘러온다. 물은 ‘용호대’로 든다. 바위등거리로 쌓은 제방 아래 강물이 잔잔하다. 거기에 ‘김군보’의 보아구가 있고 김덕원이 숨어 지냈다는 굴이 있다.
다리에서 바라본 강은 깨끗하다. 바위도 없고 큰 돌도 없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만이 강둑사이로 흐른다. 다리 건너는 음지말이고 기념관 쪽은 양지말이다.
나는 ‘보’를 따라 내려갔다. 강을 보면서 산모퉁이를 돌아가자 길 위에 우뚝 서 있는 하얀 대리석이 보였다. ‘덕원산길 국무총리 한승수’라 쓰인 거대한 지석의 이정표였다. 길은 비탈을 이룬 밭 사이를 지나 산으로 이어졌다. 용호대 사람들에게 이 산은 뒷산이었고 항골로 가는 고갯길이었고 송이가 잘 나는 산이었다.
덕원산길에서 내려서면 강이다. 길과 강이 만나는 그쯤에 ‘영천’이란 샘이 있다. 이 샘은 ‘벼락구미’를 돌아 용호터나 항골을 넘어 다니던 사람들의 목마름을 달래주던 샘이었다. 샘을 따라가면 ‘항서재’를 넘게 된다.
‘영천’ 입구에는 용호대 양지말 강가에서 시작되는 보(수로)가 지난다. 이 보가 ‘김군보의 보’다. 봇물은 산 밑 벼락구미를 돌아 ‘동창 뜰’로 이어진다. 벼락구미에 수로를 내고 바위에 해서체로 ‘보주 김군보(洑主 金君甫)’라 새겨진 것으로 보아 김군보 개인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산204-1. 보제각과 비문을 세운 그곳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200여 년 전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이 보는 내촌면 물걸리 지역 일대의 농지개척과 관련된 농경유적으로, 조선 후기의 수리 및 관개 시설의 형태를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어 강원도문화재 동창보(東倉洑ㆍ강원도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보를 따라 이어진 길은 ‘남강로’다. 나는 수양버들이 늘어진 가로수 길을 좋아한다.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찰랑인다. ‘김군보’를 정비하고 길을 확포장하고 강을 정비하면서 ‘남강로(南江路)’라 이름 하고 강 이름은 ‘용호강’이라 했다. 강에는 ‘짝바위’가 있고 바닥은 물결에 다듬어진 바위가 쫙 깔려있다.
강물은 푸른 하늘을 가슴에 담고 잔잔히 흘러간다. 한때 강물에 잠긴 바위위에서 메기낚시를 한 적이 있다. 오솔길을 걸어 들어와 낚시를 던져놓고 듣던 물소리가 아직도 귓속을 솔아든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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