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치령 고개 너머 구비에는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마의태자 노래비’가 있다. 노래는 ‘행치령 고개 너머 백자동 고개 너머 산새도 오지 않는 깊은 산골 갑둔리’라고 시작된다. 받침석도 없이 비스듬히 뉘여 세운 노래비 뒤에는 바위가 버티고 있고 그 옆에는 작업대기소 컨테이너가 서 있어 황량하게 느껴진다. 비운의 왕자 마의태자의 생을 보는 듯하여 씁쓸하다.
마의태자 노래비는 그의 전설이 남아있는 ‘김부리’를 생각하며 쓴 듯 한 노래지만 마의태자와 행치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의태자의 본명은 김일(金鎰)이며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이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정비석의 산정무한에서) 그 길을 따라 나서본다.
태자가 경주를 떠난 것은 왕건이 세운 고려에 통치권을 이양한 935년 이후의 일이다.(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群下謀 擧士降太祖 君臣之義 或爲以可 或以爲不可 - 三國史記卷第十二) 태자는 왕께 충성스런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과 더불어 합심하여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힘이 다할 때까지 지킬 것을(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以後己 宣以一千社稷一旦輕리與人 - 三國史記卷第十二) 간청하였으나, 왕은 죄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과 뇌를 땅에 바르도록 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다(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莘之民 肝腦塗地吾所不能忍也 - 三國史記卷第十二)며 항복한다.
경주를 떠난 태자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그 후 그의 행적은 전설로 남을 수밖에 없었고 전설이 남아있는 행로를 따라 나설 수밖에 없다. 태자는 소백산맥의 계립령(하늘재)을 동생 덕주공주와 넘으며 경주의 하늘을 돌아보며(국망봉) 충주 월악산 자락 미륵리에 대원사를 짓고 머문다. 이때 덕주공주는 덕주사에 머물며(덕주골) 바위에 마애불을 새기는데 그것이 바로 덕주사마애불이다. 그 후 태자는 덕주공주와 헤어져 남한강을 따라 여주 신륵사에서 머물다가 양평 용문을 거쳐(용문사의 은행나무는 태자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라는 전설이 있다) 원주로 향한다. 원주에서 ‘횡성 탑산(어답산)’을 거쳐 ‘홍천 동면 노천리 공작산 지왕동(至王洞)’에 와 머물다(왕터)가 ‘조하대(朝霞垈-지금의 조가터)’를 지나 내촌면 광암리 소뿔산(우적산) 군유동(君留洞)에 머물다가 ‘군너미고개’와 ‘가마봉’을 넘어 ‘상남면 김부리(金富里)’에 자리 잡은 듯하다. 이곳에서 태자는 신라 부흥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麻衣)를 입고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죽는다.
‘김부리’에는 지금도 ‘마의태자 영정각’과 ‘김부왕의 무덤’과 ‘석탑’이 있고 ‘갑둔리’ ‘다물리’ ‘옥새바위’와 ‘단지골’ 등 태자와 관련 있는 골짜기와 봉우리들이 전해지고 있다. 갑둔리와 김부리는 이웃한 마을로 지금은 군사 작전지역에 편입되어 군사 훈련장이 되었다.
‘갑둔리’는 동학농민혁명과도 관련이 깊다.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이 1880년(고종 17) 5월9일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김현수’씨 집에 경전간행소를 설치하여 그해 6월14일에 ‘동경대전’을 완간하게 된다. 인제 갑둔리로 피신하게 된 이유 또한 그 지역에 천도교도들이 많아 은신하기가 수월했다. 이 당시 홍천, 내면(당시에는 인제군), 서석에서도 포교활동이 이루어졌고, 서석 풍암리 자작고개에서 대항전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행치령은 강원 동서(양양-홍천) 교역의 길이었다. 서석 수하리(절골)와 인제 상남면 상남4리(미교리)를 잇는 고개다. 백암산-아홉싸리-행치령-응봉산-매봉산-모두부치-흥정산-덕고산-오음산을 잇는 영춘지맥의 한 구간이다.
행치령 정상에서 상남 쪽으로 조금 내려오다 오른쪽에는 인제군에서 세운 표지석이 있다. 행치령이란 글씨와 함께 작은 글씨로 학치령이라고 쓰여 있다. 행치령에 얽힌 이야기는 학 무덤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말엽 어떤 이가 자기의 부인을 묻을 자리를 찾고 있던 중,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스님이 명당자리를 일러주면서 깊이 파지 말고 묻으라 하였다. 그곳을 파 보니 물이 솟아나 더 깊이 팠다. 그러자 그곳에서 학 세 마리가 날아갔다고 한다. 그 후 학이 묻혀 있던 곳을 학 무덤이라 부르고 고개를 학치 또는 행치라 부른다. 행치령은 행칙령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행치령은 차 한 대가 지나다니기도 어려운 아주 험한 길이었다. 서석에서는 내촌 물걸리를 거쳐 와야리 아홉싸리 고개를 넘어 다녀야 했다. 그런 길이 군부대의 도움으로 1986년 10월15일에 개통되었다. 고도 차이를 실감할 만큼 수하리 절골에서 오르는 길은 길고 험하지만 내리막은 짧다.
마의 태자 노래비에서 작업대기소 뒤로 돌아가는 골짜기는 가파른데 ‘엄가다리 골’이다. 도로가 나기전 행치령을 넘던 옛 고개 길이다. 행치령의 정상은 수하리 쪽으로 좀 더 올라와야 한다.
정상 고개 마루에는 ‘행치령 770m’란 표지석이 오른편에 서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아름답다. 첩첩이 겹 두른 산의 색채감과 나직나직 이어지는 봉우리들 사이로 길이 흘러간다. 저물 무렵에 밀려오는 노을은 온산을 불태우고 금세 어두워진다.
고갯마루에서 내려오다 맞이하는 첫 구비에는 ‘수유동 무너미’라는 표지석이 서있고 샘물공장의 간판도 서있다. 마을까지는 오리쯤 가야한다. 무너미는 내면 방내 땅이다.
굽이굽이 돌아 내려오는 길에는 야생화가 피어있어 피로감이 덜하다. 바람이 불어올라오자 우수수 떠는 나뭇잎소리가 골짜기를 울린다. 온몸이 시원하다.
행치령을 다 내려왔다 싶은데 오른쪽 골짜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큰 통골’인데 응봉산으로 이어진다. 구비를 돌아 내려서면서 구비 사이로 하늘과 맞닿은 행치령 고갯마루가 보인다.
나는 어느새 고개를 다 내려온 것이다. 다리를 건너 계곡에 들어가 첨버덩 물에 뛰어들었다. ‘큰통골’에서 나오는 물줄기는 가늘지만 ‘횟골’에서 나오는 물줄기는 세차다. 임도가 나있어 알음알음 찾아오는 곳이다.
횟골은 골이 깊다. 계곡은 왼편으로 굽어 아홉싸리재를 향한다. 행치령 마루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굴바우골’을 만나면서 다시 오른쪽으로 굽어들면 평지가 나온다. 낙엽송이 우거진 숲을 지나면 왼쪽으로 골이 보이는데 ‘큰곱창자골’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골이 많아 창자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횟골막치는 엄가다리 골이다. 이 길은 행치령이 뚫리기 전에 사람들이 걸어 다녔던 옛길이다.
돌아내려오는 길은 숲 그늘이다. 국도로 나와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내려오다 보면 솔밭사이로 보이는 바위벼랑을 만난다. 계곡 건너편에 문짝처럼 서있는 일명 ‘짝바위’다. 솔밭사이엔 피서 온 사람들의 텐트가 쳐져있다. ‘짝바위’에서 이어진 암반이 개울 바닥에 쫙 깔려있어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골바람과 그늘이 깊어 시원하다.
짝바위는 응봉산 줄기지만 건너편은 백암산줄기다. 백암산줄기 또한 시원시원하게 이어지다가 푯대봉을 이룬다. 푯대봉은 수하리와 물걸리 와야리의 중심을 이룬다. 수하리쪽으로 내려온 골은 ‘문바우골’이다. 이곳은 십여 년 전에 놀러왔던 적이 있다. 양편에 문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서있고 그 사이로 가늘지만 물줄기가 폭포처럼 흘러 내렸다. 지금 문바위는 무너져 바위 벼랑을 이루고 있다. 광산과 폭우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사방공사를 했다한다. 문바위 왼편쪽에는 유리, 광섬유, 도자기, 화장품의 원료인 규석을 캐다 만 광산이 있었는데 주인이 바뀌어 다시 채광을 하고 있다.
문바위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작은 동골’로 들어가는 임도가 있다. 임도는 내사동까지 이어지고, ‘내사동’에서 ‘안절골’로 넘는 고개를 넘어 응봉산으로 올라갈 수 있다.
‘연작골’은 ‘연재기골’이라고도 한다. 다리를 건너기 전 멋들어진 소나무가 서 있는 집 앞쪽으로 난 골이다. 성황당이 있던 자리는 다리 아래쪽이다. 다리를 건너면 ‘웃뭇골’이다.
‘푯대봉’의 능선은 웃뭇골에 와선 ‘도로봉’을 세우고, 그 줄기가 ‘용호대’ ‘벼락구미’까지 이어진다. 이 능선 자락에는 깊지 않지만 ‘설통바위골’이 있다. 양지바른 골인데다가 벌통 놓기 좋은 ‘석자리(벌이 잘 드는 자리- 옛날에는 사고 팔았다 한다)’라 벌이 잘 든다고 한다. 가루개 고개 못미처 솔골이 셋이 있는데 ‘큰솔골’, ‘가운데솔골’, ‘옆솔골’이다.
‘마방’과 ‘주막’도 있었다. 행치령에서 ‘가루개고개’나 ‘구둔치고개’ 들머리에는 크고 작은 마방과 주막이 있었다. 그 중 ‘장수원’의 ‘마방’이 제일 컸던 것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방’은 곡물을 비롯한 특산물을 싣고 들어오는 우마차 일행의 쉼터였다. 대부분 주막도 같이 했다고 한다. 이곳에 들어오면 소나 말에게 염(소금과 여물)을 먹이고 우마차꾼들은 술로 목을 축였다. 따라서 마방에는 ‘갈보’와 ‘건달패’들이 빌붙어 생활하였으며, 더러는 시비를 붙어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장수원의 마방은 이층집에다 갈보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내륙의 요충지이며 사통팔달의 중심이었던 동창을 중심으로 영 너머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설통바위골’과 ‘절골 삼거리’ 중간쯤에 있던 주막은 한국동란 후에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새 물걸리와 절골로 갈라지는 삼거리까지 내려왔다. ‘절골’은 외사동과 내사동으로 갈라진다. 행치령으로 오르는 골은 외사동이고, 응봉산 쪽으로 오르는 골은 내사동이다. 물걸리로 가자면 ‘가루개’고개를 넘어야한다. 절골로 들어가 막국수를 먹고 내사동(안절골)으로 들어섰다.
‘내사동(안절골)’은 절골 쉼터에서부터 들어서게 된다. 응봉산은 영춘지맥의 높은 봉우리이면서 홍천 서석과 내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자연히 뿌리내린 능선과 골이 많고 양지바른 남향이라 절이 많이 들어섰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절골 쉼터에서 안절골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무사골’이고 왼쪽은 ‘물방아 둔지’다. ‘무사골’은 절이 없었다. 물방아 둔지에는 물레방아가 있었고. ‘웃방골’을 지나 ‘샘둔지’에서 물을 받아내렸다 한다.
‘샘둔지’ 안막은 ‘젖은골’인데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샘이 솟아나 흐른다고 한다. 산막이면서도 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늪처럼 물이 고여 있다. 샘둔지 또한 어디를 파든 물이 난다. 밭농사를 하면서도 물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샘둔지를 지나면 ‘사스레골’과 ‘새덕골(새닭골)’이 나온다. ‘사스레골’에는 사스레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사스레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나무다. 껍질은 백색이며 종잇장처럼 벗겨진다. 사스레나무 숲은 겨울에 가야 진경이다. 눈처럼 하얀 껍질을 하고 칼바람에 맞서 가지를 흔들면서 겨울을 견뎌내는 우리 토종 나무다.
‘새덕골’은 ‘새닭골’이라 한다. 산닭이 많이 내려왔다는데, 산닭이 새처럼 난다하여 새닭이라 부른다고 했다. 골을 보면 새둥지처럼 생겼다.
응봉산 봉우리를 보고 싶었다. 성급한 탓일까? 자꾸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바른골’을 지나 ‘큰각골’을 지나, 범(호랑이)이 새끼를 쳐 나갔다는 ‘범난골’로 들어서자 멀리 봉우리가 보였다. 날개를 펼치고 앉아있는 매의 모습. 어디를 보고 있는지 햇살에 반짝인다. 저녁햇살이 비껴들어 눈부시다.
이제 응봉산 오르는 안막까지 온듯하다. 길은 ‘매봉골’로 들어선다. 등산로도 확연하다. 전국에서 다녀간 등산객들의 산행꼬리표가 나무마다 매어있다. 바위를 기어올라 봉우리 능선을 돌아 정상에 올랐다. 응봉산(1089m) 정상은 표지석을 세우느라 벌목된 공터로 비어있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에 등까지 후줄근하게 젖은 땀을 식히고 돌아 내려간다. 멀리 백암산과 소뿔산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운무산과 치악산이 눈에 든다.
정상은 돌아서면 높아 보인다. 돌아 내려 올 때마다 정상의 위대함과 고적함을 생각한다.
저 외로움을 어찌하겠는가.
절골 쉼터에서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양지말로 내려오다 황수터에 둥지를 튼 ‘이예원 화가’의 작업실에 들렸다. 판화를 작업하시는데 올 때마다 문은 걸려있고 키다리 꽃이 노란 얼굴을 하고 맞는다. ‘풍경처럼 바람을 흔들다 갑니다’ 메모지에 써서 문틈에 꽂는다.
‘무사동’ 아래 둔지를 이룬 ‘황수터’ 뒤로 ‘도감동(도광동)’은 ‘수리봉’(응봉산을 말하는 듯했다)에 닿는다는데 제법 골이 깊다.
다리 아래쪽에는 사람이름이 붙은 소(沼)가 있는데 ‘영길네소’다. 김영길이라는 사람이 소 근처에 살고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다리를 건너 항골양지말로 들어서니 해도 뉘엿뉘엿 진다. 산 밑에 서석초교 항곡분교가 보인다. 방학이라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어린 시절의 메아리가 꽃밭에 벌처럼 울린다. 항곡분교에 근무하시던 선생님 한 분이 ‘구리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들려준 것을 기억한다.
‘구리대’{백지(白芷)·대활(大活)·흥안백지·독활·굼배지·궁궁이라고도 한다}를 시골에선 ‘구리당’이라 부른다. 늦가을 잘 마른 구리대 대궁을 꺾어 여물에 삶은 후 속살을 훑어내고 잘 말려 구멍을 내 퉁소를 만들어 불면 풀 향기 같은 맑은 소리가 난다. 구리대 퉁소에 얽힌 이야기는 피리골에 전해진다.
이야기는 진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기왕이 태기산에서 수양을 하고 있을 때, 중 태자와 공주가 왕을 찾아 가던 중에 길을 잘 못 들어 생곡리로 와서 묵게 되었다. 이때 수행 공주가 구리대로 퉁소를 만들어 불며 밤을 지새우고 떠났다. 그 후로 이곳을 피리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이야기를 음악을 하는 친구에게 들려주었더니 꼭 만들어 보고 싶다했다. 앉은뱅이 옥수수동동주를 허리에 차고 달을 벗 삼아 울려퍼지는 퉁소 소리를 기다려 본다. 나는 또 기다릴 무엇이 있어 행복하다.

산에 들어
붉게 물들어
며칠을 아파야겠다
속이 맑아지도록 비우고 비워야겠다
더 그리워지도록 불 사루어야겠다
내 사랑 어딘가
그대는 아직 거기 있을 것 같다

- 저산에 -

행치령 통골에서, 횟골에서, 샘둔지에서 흘러든 물은 목을 느리며 말등소 아래로 흘러든다.
검붉은 노을이 지고 반딧불이 같은 불빛이 강을 밝힌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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