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라 하지만 마른장마다. 연일 35도가 넘는 살인적인 폭염을 퍼붓는다. 논밭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잃고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는 등 이상고온이다. 더위에 힘겨운 듯 초록의 생명들도 축 늘어져있다.
길옆으로 흐르는 도랑이나 샘에서 수건을 적셔 목에 두른다. 그늘을 찾아 더위를 식힌 뒤 다시 길을 나선다.
솔치재를 걸어 넘으려 했으나 오늘 같은 날씨에는 무리다.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차들도 갤갤대며 넘었던 고개인데 일분도 채 안 돼 ‘소이금이’에 닿는다. 터널을 지나면서 만나는 골은 ‘영장의 터 골’인데 물이 흐르지 않는다. 그 아래 골은 ‘소이금이’다. ‘솔치고개’는 소이금이와 장평을 이어주는 길이다. ‘이금이(예금이)’라는 말은 질 좋은 금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예금이라는 처녀가 살던 골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금광도 없고 처녀도 살지 않는다. 다만 처녀의 가슴을 닮은 산의 곡선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푸르다.
소이금이는 매봉산 자락의 골짜기이며 지금은 기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터널이 뚫리고 나서 고개는 페쇄되었고 장평에는 목초지를 만들어 산양을 키웠다. 지금은 축사만 덩그러니 서있다.
어느새 ‘방가대’ 늘미나무주막거리(어론분교)를 지나 444번 지방도로를 따라 동면방향으로 들어섰다. 땀에 흠뻑 젖었다.
어론은 크게 다섯 개의 마을이 펼쳐져 있다. 용두안, 황정골, 방가대, 이금이, 와둔지 이다. 그 중 제일 깊은 골은 황정골이다. ‘황정’이란 말은 황장목에서 왔다고 한다.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던, 질이 좋은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하는데, 이 골짜기에서 황장목이 나갔다고 한다.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나면 뗏목을 띄워 실어냈다고 한다. 또 황정나무(황벽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황정골은 수리봉을 중심으로 골짜기를 이룬다. 수리봉은 먼드랫재와 부목재를 잇는 긴 능선에 우뚝 선 봉이다. 청량리의 가골과 노장골, 풍암리의 감두리 그리고 어론리의 미울, 살구베리, 대이금이를 감싼다.
황정골 다리를 건너 첫 번째 집으로 들어갔다. 밭일을 하다 너무 더워 물 마시러 들어왔다며 냉수를 건넨다. ‘가재가 어느 골에 많아요?’ 물으니, ‘그런걸 왜 묻냐’고 한다. 너스레를 떨며 ‘가재국이 먹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잡으러 간다’고 하자 맞골을 가르쳐 준다. ‘맛’이 아니고 ‘맞’이라며 써보여 준다. 황정골을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한다고 해서 ‘맞골’이라는데 물이 제법 실하다.
맞골을 지나 둔덕배기는 ‘정구터’다. 김원기씨(73) 집이 눈길을 끈다. 진흙으로 된 봉당 사이로 돌계단이 있고 마루가 놓여 있다. 부엌에는 무쇠 솥이 걸려있고 솥뚜껑으로 덮어놓은 질화로가 아궁이 옆에 놓여있다. 부엌 의지간에는 장작이 가득 쌓여있다. 할망구가 아침저녁으로 불을 지펴 밥을 한다고 한다. 낯선 사람의 발소리에 외양간에서 소들이 일어난다.
김원기씨는 최근에 허리를 다쳐 구들장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씨앗을 넣지 못한 땅이 있다며 근심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마당까지 내려와 골짜기를 가리키며 설명해주신다.
“저 골짜기가 ‘마당터골’이지. 안막으로 들어가면 마당처럼 널러지는데, 한때는 사람들이 꽤 많이 살았다구. 저 위 골은 황정재 골이야. 마가리에서 청량리로 넘는 황정고개와 횡성 봉명리로 넘는 달릉재로 갈라지지. ‘감두리’도 저 길로 넘어 다녔다고. 그리구 저 위 오른쪽 말이야. 석재골이야. 그 골이 깊다구. 수리봉으로 오르는 길인데 가파르고 바위가 많아 험하지. 수리봉에는 동굴이 있는데 수직으로 들어가는 굴이지. 그래서 ‘수직동굴’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쇠구녕바위’야. 사람이 들어갈 앉을 수도 있을 만큼 방석대기처럼 돼 있다구. 바닥까지는 들어가 보지 않았는데, 돌을 떨어뜨리면 한참 있다가 ‘텅’ 소리가 난다구. 잘 다니시게. 허리가 아파 그만 누워야 겠네.”
어깨를 부축해 방까지 모셔다 드리고 석재골로 올라갔다. 황정재 골과 갈라져 올라가는 길옆으로 꽃이 만발해있다. 길은 산 밑을 돌아 굽어 있고, 둔덕을 올라서니 조립식집이 보였다. 노모와 아들이 살고 있는 집. 아들은 전정가위를 숫돌에 갈고, 노모는 감자를 씻고 있다. 물맛 한번 보라며 자리를 내준다. 물 본 김에 세수까지 하고 앉았다. 석재골 안으로도 길이 넓은데 물이 좋고 공기가 좋아 땅 나오기가 무섭게 팔린다고 한다. 들어오는 길도 꽃나무도 저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문득 자신의 고향을 만드는 사람들은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꾸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내려가려는데 사내가 ‘대이금이 교회에 손 좀 봐줄 나무가 있다’며 동행을 자처하고 따라 나선다. 오랜만에 함께 가는 친구가 있어 즐겁다. 대이금이는 ‘부목재’(불목재-동면 노천 물골과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오르는 길 맨 끝 마을이다. ‘야촌’과 ‘살구베리’, ‘과우’를 지나야 한다.
황정골을 나와 444번 지방도에 올라서니 야촌이다. ‘고야산’의 산그늘이 시원하다. 어론, 노천, 장평의 모두부치인 매봉산의 한 봉우리이다. 길 따라 마을을 이룬 ‘야촌’은 미울에서 흘러내린 개울과 황정골 물이 흐른다. ‘박새골’과 ‘되경골’의 산 비탈에 감자 꽃이 한창이던 보름 전 이 길을 지났다. 지금은 감자를 다 캐고 들깨가 심어져 있다.
산바람에 칼날 같은 옥수수 잎사귀가 서걱거린다. 팔뚝만한 옥수수 토생이의 붉은 수염이 수득수득 마른걸보니 머지않아 옥수수를 먹겠다.
어느새 ‘과우’ ‘살구베리’ 입구까지 왔다. 동행과는 헤어지고 나는 살구베리로 내려섰다. 살구베리는 국유림 관리소에서 숲 체험장으로 개설해 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휴식년제로 출입을 할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한 것일까. 인간중심의 삶이 자연중심으로 바뀐다면 서로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바로 휴식년제는 인간의 손을 떠난 숲이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 인간은 초록의 생명과 말 못하는 동물들의 삶에 끼어들려 하는가? 자연은 특히 지구라는 별의 주인은 모든 생명들과 삶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와 고기를 구워먹은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휴식년제로 얼마간은 치유되겠지만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습성이 바뀌지 않는 한 상처는 더 깊어질 것이다.
살구베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청정 계곡이다. 숲 체험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쳐 버릴 정도로 외진 곳이다. 솔직히 알려질까 염려스럽다. 파란 이끼를 두른 바위틈으로 울려나오는 물소리가 맑다. 느릅나무와 개물푸레나무, 신갈나무, 물박달나무, 황벽나무가 드리운 그늘이 더위를 말끔히 씻어낸다.
용소는 ‘밤나무골(율목)’과 ‘심밭골’이 만나 작은 폭포를 이루는 곳이다. 심밭골로 들어서면 ‘도떨어지기바위’가 있다. 수리봉 쇠구녕바위로 오르는 산길에 바위 벼랑을 이룬 바위이다. 더욱이 도떨어지기바위는 산마루 ‘줄바위’까지 이어진다. 날쌘 산돼지도 길을 잘못 들면 떨어져 죽을 정도로 깎아지른 벼랑이다. 사냥꾼들은 산돼지를 이리로 몰아 잡았다고 한다.
30m정도의 깎아지른 바위벼랑 - 도떨어지기바위에서 왼쪽 골짜기로 들어서면 ‘성골’이다. 성골로 들어서면 ‘성바위’가 산 능선마루에 자리한다. 성바위를 지나 줄바위로 올라간다. 줄바위는 수리봉으로 이어진다. 쇠구녕바위는 바로 수리봉 정상아래 있다. 쇠구녕바위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계단처럼 굴벽에 앉을자리가 되어 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시원하다. 들어가려니 바닥을 알 수 없어 떨리고 겁난다. 그냥 수리봉으로 올랐다.
수리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들이 낮게 낮게 마을로 이어지고 골짜기 골짜기는 물길을 내며 흘러간다.
수리봉 아래 너른 마당을 이룬 곳에 ‘곤드레지기’가 있다. 마을사람들은 ‘곤드레취’라고 하는데 곤드레가 ‘쭉 내갈렸다(많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곤드레나물은 고려엉컹귀, 곤달비 라고 한다. 해발 700m 고지에서 자생하는 산채로서 그 맛이 담백하고 향이 독특하며 영양가가 매우 풍부하다. 가난했던 시절 부족한 끼니를 푸짐하게 하기 위해 나물죽에 넣었던 구황식물이다. 큰 잎사귀에 긴 뿌리가 특징인 산나물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의 모습이 술 취한 사람과 비슷하다고 해서 ‘곤드레’라 불리게 되었다.
곤드레지기를 중심으로 넓게 마당을 이룬 곳을 ‘만찬의 터 골’이라고 한다. 밥과 막장만 싸가지고 가면 ‘만찬의 나물’을 먹을 수 있고, 또 천종의 심도 심심치 않게 본다고 한다. 심바골은 그렇게 하여 생긴 이름이다.
다시 용소에서 밤나무골로 들어섰다. 길은 임도로 부목재까지 이어진다. 얼마만큼 오르면 구유소가 나온다. 물살에 패인 바위가 구유를 닮았는데 천연의 미끄럼틀이다. 훌렁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고 싶지 않다. 밖은 불구덩이의 살인더위. 그런데 더 있고 싶어도 물이 차서 얼겠다. 한결 시원하다. 원추리꽃과 동자꽃이 화신(花身)을 한창 뽐낸다.
조금 오르막을 지나니 폭포다. ‘용소’보다 조금 더 웅장하다. ‘너사메기’에 있다하여 그냥 너사메기 폭포이다. 폭포는 두 물줄기가 합수를 이루는데 왼골은 ‘너사메기골’이고 오른골은 ‘미울’이다. ‘너사메기’란 산 능선 가운데 넘어 가는 목을 말하는 듯하다.
‘부치’, ‘구미’, ‘메기’가 붙는 우리 땅의 지명에는 서러움이 담겨있어 힘들고 고되더라도 찾아가보고 싶다. ‘너사메기(노새매기)’에는 금광이 있었다.
‘미울(美鬱)’로 오르는 길은 수풀이 더 우거졌다.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미울’은 산봉우리가 울타리처럼 에두른 아늑한 곳. 이곳은 아마도 동학 농민운동 때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된 듯하다. 두 개 반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인데 다 쫓겨나면서 인적이 끊긴 마을이다. 미울에서는 부목재로 가는 길과 삼포막으로 가는 길로 갈라진다. ‘삼포막’으로 오르는 길은 마당대기를 이루고 정상은 동면과 서석과 횡성이 맞닿은 모두부치로 능선이 넌출넌출 이어져 나간다.
옛날에는 살구베리로 다녔다는데 지금은 임도가 나면서 부목재 정상에서 들어갈 수 있다. 특히 약초꾼들이나 나물 뜯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아무도 살지 않는다.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거기에.
아름드리 느릅나무가 칡이며 다래 덩굴을 거느리고
푸른 이끼 감싸 안은 바위가
제 몸 비추며 흘러가는 물소리
먼 듯이 바라보는 하늘 거기에.
광주리에 가득 담긴 별들이 찰랑대며 반짝이는 거기
눈빛 흐려지기 전에
그냥 숲으로 들어 고요해지고 싶은 날이 있다
도시라는 먼지가 이끼처럼 자라고
푸른 권태가 어슬렁대는,
어정쩡한 삶의 중심을 놓고 가면,
나를 받아주겠나 망설이면서도
들어서는 미울 같은 거기
그냥 숲으로 들어 침잠해지고 싶은 날이 있다

- 거기에 -

임도를 따라 부목재에 닿았다. 부목재 정상에는 율목(밤나무골)까지 이어지는 임도(林道) 안내판과 부목재 표지석, 그리고 ‘제1군사단장의 선덕비’가 서있다. 고개를 내려오면 대이금이고, 고개를 넘으면 동면 노천 ‘물골’이다.
‘대이금이’는 마가리다. 과우 살구베리와 합쳐지는 병목골 안쪽이다. 매봉산 쪽으로 이어지는 골이 있는데 이름을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대이금이에는 기도원과 사슴농장이 있다.
대이금이를 지나 내려오면 ‘범의 골’이 나온다. 범의 골로 오르면 성바위를 지나 줄바위-쇠구녕바위-수리봉에 닿는다.
‘나들이 쉼터’에서 물 한잔을 얻어 마시고 지나가는 차를 기다린다. 청바지에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모자를 쓴 나를 ‘왯둔지(와둔지)로 데려다줄 차를 기다리는 것이다. 정말 많이 걸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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