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햇살의 노래는 담채화처럼 번지고
까무잡잡한 어린 시절은
섶다리를 건너온다
미루나무 잎을 흔드는 바람이나
자갈자갈 흘러가고 흘러오는 물의 노래는
마음 한가운데로 물결진다
물결마다 수천의 얼굴이 묻어난다
너를 생각하며
흘러가는 나를 본다.

- 섶다리를 건너며 -

추억으로 가는 다리-섶다리는 봄에 놓았다가 장마 때 철거하고 시월쯤에 다시 놓는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소통의 장이었고, 처녀 총각의 오작교가 되기도 한다.
여울이 지나가는 자리에 Y자 모양의 참나무로 다릿발을 세우고 낙엽송으로 장대를 엮은 뒤 소나무가지를 깔고 진흙을 덮어 만든다. 옛날엔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다리를 놓았다.
섶다리는 강으로 나누어진 작은 두 마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지만 오늘날엔 찢기고 갈라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통합의 상징으로 놓기도 한다.
강은 놀이터다. 고기잡이·물놀이뿐만 아니라 돌탑 쌓기도 하고 소꿉놀이도 즐길 수 있다. 다리 위에 앉아 몰려드는 고기를 보면서 줄낚시도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누구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섶다리를 건너 고양산으로 향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홍수가 나서 봉우리만 남았는데 그 생김새가 고양이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고양이산이라 부르기도 했다한다.
고양산은 아미산 끝자락 해발 675m 나지막한 산이지만 뭇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으로 아기자기한 등산의 묘미를 더해준다. 암벽을 타고 줄에 매달려 오르는 재미도 있지만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서너 번은 토해내야 한다.
정상에 오르면 백암산, 응봉산, 흥정산, 덕고산, 운무산, 수리봉 등 사방이 병풍을 둘러 친 듯한 거대한 봉우리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고양산-바람굴-삼형제바위-아미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분지 속에 싸인 영서내륙의 신비를 만끽할 수 있다.
다리를 건너 장막둔지를 지나 강둑을 따라 걸었다. 왼쪽으로는 인삼밭이 이어지는데 마을에서는 벼룩구미라고 한다. 인삼밭을 돌아가면 산길 들머리가 나온다. 처음부터 제법 된 비탈이다.
가파른 경사 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풍암리, 장막 1㎞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에서 한 숨 돌리며 산 뿌리를 헤집고 흘러가는 강과 물결치듯 이어지는 산봉우리를 조망하면서 오르면 ‘천조단’이라는 작은 비석이 서 있는 곳이 나온다. 이정표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가면 샘터와 정상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온다.
샘터 가는 길 400m. 샘은 공터 우측 수직절벽 아래 굴속에서 흘러나온다. 이 동굴에서 나오는 샘물이 고양산 약수다. 굴은 폭이 3.5m, 높이4m, 깊이5m 정도 된다. 이 굴은 아미불 터로써 ‘아미불’이라는 절이 있었다. 굴 안쪽에 아미불을 모시고 입구에 요사체가 있었다. 절골이라는 이름도 이 절에서 유래된다.
고양산 바위굴은 용두안마을과 얽힌 사연이 있다. 고양산 절에 살던 스님들이 바위 굴에 가서 목탁을 치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염불을 외면 ‘용두안’ 마을의 처녀들이 바람이 나서 동네가 시끄러웠다. 마을사람들은 회의를 한 끝에 절을 빼앗고 불질러 폐사시켰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에 ‘조 보살’이 암자를 짓고 불사를 이뤄 많은 불자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반공(反共)을 앞세운 정부의 시책에 따라 무장공비 등 불순분자들의 은거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철거되고 절터만 남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최근 샘터 앞쪽에서 국내 최대의 무궁화나무가 발견돼 화재가 되고 있다. 이 나무를 처음 발견한 심형기(61·서석면 번영회장)씨는 ‘서석면장 재직시 이곳에 등산로를 닦고 샘터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이 무궁화나무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무궁화나무는 수령이 50~100년으로 추정되며 수관 넓이 7.7m, 직경 36.7㎝, 높이 7.5m에 이른다. 밑둥치부터 두 줄기가 서로 엉켜있고 속이 썩어 구멍이 나 있다.
특히 인근에는 높이 4~5m 크기의 무궁화나무들이 함께 자라고 있으며 주위에 한 아름이 넘는 가래나무 등이 자라 원시림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양산에 올라갔을 때 무궁화나무는 진분홍색의 무궁화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샘터 삼거리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능선은 노송이 잘 어우러진 바위벼랑을 끼고 올라야 한다. 벼랑 한편에는 한문으로 음각된 “원(元)” 글씨가 있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길고, 짧은 밧줄을 타고 올라야 한다.
고양산 정상은 조망이 아름다운 곳이다. 강을 따라 펼쳐진 군두 벌과 풍암뜰, 운무산의 암봉과 응봉산 산마루가 이루는 곡선은 진경이다. 또한 고마고마한 봉우리들 사이로 이어지는 강과 길은 산촌의 아늑함을 더해준다.
고양산 큰골을 따라 내려오면 ‘중방바위 폭포’를 볼 수 있다.
고양산에는 두 개의 골짜기가 있다. ‘큰 고양골(큰골)’과 ‘작은 고양골’이다. 작은 고양골로 오르다가 수하리로 넘는 고개는 ‘지르메 골’이다.
고양산에 올랐다가 건너편 단봉산에 오르는 산행도 재미있다. 단봉산 밑에서 와둔지 약수를 마시고 열무김치를 곁들인 올챙이국수도 일품이다.
고양산 산행을 마치고 ‘어론(魚論)’으로 들어섰다. 황정골, 미울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야촌 방가대를 걸쳐 풍암천으로 흘러들어 마침내 서석의 모든 물이 모이는 큰 강을 이룬다. 물반 고기반이라 할정도로 물고기가 많아 물결을 박차고 튀는 소리가 들린다하여 어론이라 한다.
어론은 풍암들과 마주하는 용두안과 갈매봉의 방가대, 고양산을 마주하는 와둔지 단봉산, 수리봉을 중심으로 한 황정골과 살구베리, 대이금이와 과우, 매봉산의 소이금이 등 크고 작은 골짜기를 어우르는 힘차게 내리뻗은 그사이 사람들이 모여 산다.
버덩이라 할 수 있는 용두안으로 들어섰다. 섶다리를 건너 강둑에 올라 우봉 이씨(牛峰 李氏)가 묻었다는 소를 찾아보았다.
방가대는 어론 분교를 중심으로 하여 학교가 있는 자리는 늘미나무 주막거리다. 특히 대장간이 있어 북새통을 이루던 곳이라 한다. 삼거리를 이루고 있는데다가 야촌 황정골 과우 대이금이 부목재 물골로 이어지는 444번 지방도로와 소이금이 솔치터널 장평으로 이어지는 56번국도, 풍암 생곡 미약골 율전 창촌으로 갈 수 있어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방가대는 약 600년 전에 방씨 일가가 촌락을 이루던 집성촌이다. 지금은 방씨일가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방가대는 개울을 중심으로 양지말과 응달말로 나뉜다. 양지말은 촉새봉의 긴 능선이 새말까지 이어지는 햇살바지다. 촉새봉의 능선이 양지말 뒤로 봉우리를 하나 이루는데 갈매봉이다. 갈매봉 산밑으로 이어지는 양지말에는 매추나무골과 응골가는 골짜기가 있다. 응골은 단봉산 오른쪽 골짜기인데 방가대에서 수하리 ‘가두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응골에 금광을 캐던 시절 방가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넘어 다녔다고 한다.
응달말은 지금 종자연구소가 건설 중에 있는 곳이다. 입구에 해당되는 자리가 ‘풍년고개’다. 우리만의 종자를 개발함과 동시에 품질 좋은 우량종자를 농가에 보급하여 풍년을 가져다주었으면 한다. 서석에서는 자못 기대가 크다.
풍년고개를 중심으로 왼쪽 골짜기는 연자기골이고 오른쪽 골짜기는 광산골이다. 동막산 줄기와 수리봉능선이 만나는 골은 숯골이다.
연자기골을 지나 용두안으로 들어선다. 그 입구 소나무사이에 성황당이 서있다. 나는 용두안 삼거리를 앞두고 마을로 들어섰다.
용두안은 용두부리 혹은 용두뿔이라는 곳이 있는데 용의 머리를 닮은 낮은 산이다. 산 밑으로는 연못이 있었고 용 뿔처럼 튀어나온 산자락 뒤에 부자가 살았다 한다. 부자는 욕심을 내어 산자락을 깎아내어 연못을 메워 논을 만들려 하였다.
한창 연못을 메우고 있는데 갑자기 연못 속에 살던 용이 나가버렸다. 용은 산 너머 용수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서석의 부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망해버렸다고 한다. 부자들이 망하자 동네사람들도 살기 힘들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뿔을 다시 만들기로 했다. 그 후 동네에는 재물이 모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녀총각들이 바람이 나서 혼란스러워졌다. 하는 수없이 다시 뿔을 헐어내고서야 혼란을 면하였다고 한다.
용두안 부자가 망한 이야기는 하나 더 있다. 용두안에는 서석에서 제일가는 우봉 이씨(牛峰 李氏)네와 마음씨 착한 최씨네가 살았다. 최씨는 남의 집 머슴도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용두안을 지나가다가 최씨의 마음 됨을 알아보고 잘 살 수 있는 비책을 일러주었다. 비책은 다름 아닌 연못을 메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연못 속에 살던 구렁이는 도망을 갈 것이고, 그 구렁이는 당신네 집으로 들어와 복을 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님은 떠났다.
최씨는 연못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저녁에 천둥번개가 마구 치더니 연못이 저절로 다 메워졌다. 그때 구렁이가 최씨네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부인이 보고 떡시루에 가려놓고 쌀 닷 되를 꾸어다가 밥을 지어놓고 소원을 빌었다. 기도를 드린 후 구렁이를 보려고 하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후 최씨는 재산이 불어나고 시작하는 일들이 순리대로 잘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봉 이씨네와 얽힌 사연은 또 있다. 어느날 뭣좀 안다는 시림이 오더니 이씨네 집터를 둘러보고 참 좋은 집터인데 짚 앞에 있는 소(沼) 때문에 집안이 덜되니 메우라 일러주었다. 부자는 사람을 사서 소를 메우는데 석달이 지난 어느날 밤에 꿈에서 알수없는 목소리로 사흘만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깨어난 이씨는 기이한 꿈이라 생각하고 사람을 더 많이 사 메워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소를 메운 자리를 가보니 용이 나간 자리가 봇도랑처럼 패여 있었다. 그 후 우봉 이씨네는 가세가 기울어 망했다고 한다.
이 때 용이 나와 넘어갔다하여 ‘용두고개’라 하고 봇도랑이 패인 곳은 ‘용시내’라 한다.
용두고개와 용두부리는 지금도 용두안에 남아 있다. 마을 안길을 따라 들어가면 용두부리를 가로질러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가 용두고개다. 고개를 넘으면 용두안 앞뜰이 넓게 펼쳐진다.
연못이 있던 자리는 고개 넘어 아래쪽이다. 지금 우사가 들어서 있는 집은 우봉 이家 기영(78세)씨가 살고 있다. 종가집이다. 실제로 용두부리에는 묘소가 두개 있다. 용두안을 흐르던 강물은 용두부리를 휘감아 돌면서 용두안소를 만들었고 비만 오면 물난리를 겪었다. 또 부자집으로 찾아드는 손님들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귀뜸해 주셨다.
구렁이와 인연을 맺은 최가네가 살았던 골은 구렁골이다. 실제로 최가네는 구렁골 어귀에 살았다. 구렁골을 지나 산 밑으로는 길이 없다.
우리 종균연구소가 있는 골은 품은 안골이다. 느타리 종균과 표고, 최근에는 상황과 영지버섯 종균을 배양하여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강은 용의 또 다른 형상이다. 격랑을 치며 흘러가는 강의 모습은 승천하려는 용의 모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강물이 굽이치는 곳에 소(沼)가 있었고 용의 전설이 있었다. 용두안에 얽힌 이야기도 물의 소중함과 위엄을 깨우쳐주고 있다.
물길을 막지마라. 생명의 목을 죄는 일이다. 나는 황정골로 들어선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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