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고개- 동학혁명 위령탑이 세워진 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풍암리 뿐만 아니라 청량리 군두리 어론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면사무소에서 심형기 번영회장을 만나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며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자작고개를 향한다.
  서석면사무소 앞뜰에는 두개의 비가 서있다. 현감 민태호와 군수 원세기의 선정비다. 민태호는 1884년에 홍천 현감으로 부임하여 1886년 5월까지 봉직한다. 그러나 현감 민태호가 민영익의 아버지이며, 조선 후기의 척신(戚臣)으로서 어영대장·무위도통사·대제학 등을 지낸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선정비는 1885년 10월 자작고개 마루에 세워졌었는데 오랜 세월 비바람에 파손되어 1986년 5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를 다시 세웠다.
  면사무소 앞에는 연못도 있었다. 지금 서석면민회관이 서 있는 터인데, 연화부수 지형의 자리에 연못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은 지렁리의 물길을 잡는 역할도 했다 한다. 그러나 주변의 생활폐수가 흘러들어 자연히 악취가 심해지고 주변 환경에 악영향을 끼쳐 묻어버리고 면민회관을 짓게 된다.
  지렁리에서 자작고개를 넘으면 안골(안풍암골)이다. 현하는 안골의 중심이며 진등고개 밑에 있는 마을 한 쪽을 어우른다. 현하 안쪽(서석교회)은 안말이다. 마을의 중심으로 경로당과 마을 회관이 있다.
  멀리 아미산이 보인다. 골이 깊다. 큰 산이 품은 골 안으로 들어가면서 뱀딸기도 따먹고 오디도 먹는다. 문간에 심어놓은 앵두도 통통하니 불었다. 배고파 따 먹던 시절은 맛보다는 양이었다. 주둥이가 시커멓도록 따먹었다. 지금은 맛으로 먹는다. 먹다보니 손이며 입이 검보라 오디빛이다.
  안골은 골 안쪽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아미산의 물줄기가 내리치는 골짜기를 뭉뚱그려 부르는 이름이다.
  개울은 덕밭재(덕바치)와 둔지말, 뒷골(후동)을 가르며 흐른다. 덕밭재는 교회를 지나 진등배기를 아우른다. 덕밭재는 승방골로 이어지는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잡목이 우거져 있다. 반대편 골은 독장골이다. 독장골에서는 항아리를 굽던 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독장골을 지나 올라가면 소나무가 우거진 능선으로 들어선다. 골짜기에선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가장골을 지나고 병막골을 지나 산막으로 들어서자 산까치 떼가 푸드득 날개를 치며 날아간다. 가을이면 이 골짜기는 송이냄새로 가득하다. 지난 가을에 머물던 움막도 보인다.
  누런이골은 가장 깊은 골이다. 누런이골을 오르다가 왼쪽 고양산 쪽으로 오르는 길은 송장골이고, 산마루를 바라보며 쭉 따라 넘으면 수하리가 나온다. 수하리에서는 이 고개를 넘어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바람골은 아미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다. 하지 때까지 얼음이 녹지 않아 시원한 바람이 굴속에서 나온다 하는데 지금은 굴이 막혀 있다. 아미산이 홍천군립공원으로 자리매김하는데는 바람굴의 정비가 꼭 필요하다. 전설이 살아 있고 또 쉴거리를 제공한다면, 자연스럽게 이 고을을 찾는 등산객들이 많아질 것이고 바람골 쉼터로서 사랑받게 될 것이다. 또한 바람골을 따라 오르다가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큰골이다. 큰골에서 용호터골을 지나 능선을 넘으면 조조울(효제곡 유바골)이다.
  밖에서 바라볼 때는 단순해 보이던 산인데 안으로 들수록 골골이 깊어진다. 묻고 또 지도를 보고 찾아 들어왔어도 이름 없는 골이 너무 많다.

내 모르는 것들은
골에 이는 바람 속에 있고,
피고 지는 꽃과 나무에 있고,
산마루 넘나드는 나비와 새들의 울음 속에 있다.
내 모르는 것들은
다 알면서
서로 알려하지 않고
거슬리지 않고
얽매지 않는다
그런데도 고요가 가득히 환하다.

 - 숲에 들다 -

  이제 내려가야 한다. 올라올 때 안 보이던 꽃들이 보인다. 참나리꽃망울이 금방이라도 주홍빛 향기를 내뿜을 기세다. 조롱조롱 까맣게 매달린 버찌도 유혹한다. 꼴을 잔뜩 베어 실은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내려온다.
  ‘김학균 고택이 어디래요?’ 묻자 ‘김학균? 김학균?’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모르는 눈치다. 할 수 없이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다가 밭에서 김을 매는 할머니께 물어본다. 할머니는 엉덩이에 방석을 둘러메고 앉아 곁순을 따며 김을 매고 계셨다.
  ‘김학균이네? 이사 가고 없어. 지금은 장만귀씨네가 살고 있지. 효자라구. 노부모를 모시고 사는데, 뒷골 둔덕아래 큰 밤나무가 있는 집이라우. 헌데 뭔 일 있어?’
  ‘오늘 막국수를 눌러 먹는다고 놀러 오래서 가는 중이거든요.’
  정말 그랬다. 오전에 심형기 번영회장이 보여줄 것이 있으니 들어오라 하여 급히 갔더니 사진 한 장을 건네주며 시간 있으면 점심때쯤 들러 보라 한 것이다.
  마을 회관을 지나 뒷골로 들어섰다. 뒷골(후동)은 음성골과 아미산 바람골에서 흘러내리는 개울 사이에 밋밋한 둔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우체국에 다니는 친구 낙인이가 태어난 집도 산 아래 자작고개를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밤나무만 보고 들어섰다. 마당에는 벌써 여러 대의 차들이 서 있었다. 문 앞에 ‘홍천 김학균 가옥’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마당 안채가 ‘ㅁ’자로 자리를 하고 있다.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과 곳간이 있다. 대청은 풍광이 잘 들도록 뒷문이 있고, 사랑채는 대문을 사이에 두고 아래 웃방과 광이 있다.
  원래 이 집은 1903년에 엄근호가 지은 집이다. 엄근호는 마을의 부자였다.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강에도 산에도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 집을 들일 때 진구렁인데다가 지대가 낮아 인부들을 동원해 석 달 동안 지경을 다지고 집을 지었다고 한다.
  집을 짓자 현감이 엄근호를 불러 문책한다. 이유는 단 하나. 촌부가 구중궁궐 같은 집을 지었다는 것으로 태형(곤장)에 처하게 된다. 엄근호는 사람을 사서 대신 곤장(흥부전에서 흥부가 돈을 받고 곤장을 맞는다)을 맞게 한다.
  안채는 육송을 켜서 짓고 사랑채는 헌집을 헐어 다시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에는 중문을 달고 밖에서 안채를 들여다 볼 수 없게 하였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정자처럼 마루를 높게 했다. 상량에는 대정1년이라는 기록이 있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엄근호는 집을 김학균의 부친에게 팔고 마을을 떴다고 한다. 일설에는 기생에게 홀려서 가산을 탕진했다고도 한다.
  김학균이 이 집에 들어온 것은 그의 나이 두 살 때이다. 그 후 1976년 강원 영서지역 산촌부락의 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됐다. 그 후 보수도 못하고 살다가 1988년 장만귀씨한테 팔고 이 마을을 떠났다.
  장만귀씨는 거의 폐가나 다름없는 집을 집터 하나만 보고 들어와 보수하여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보수하려고 중문을 헐었을 때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한다.
  대청에 올라서니 대들보와 서까래가 회벽 사이로 단아하다. 뒷문 윗벽에는 고조부 증조부 조부 그리고 자신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고, 표창장과 손자의 사진이 또 다른 벽면에 걸려있다.
  뒷문 바람이 시원하다.
  집 안팍을 돌며 사진을 찍는데 할머니가 대문을 닫고 빗장을 지른다. 그리고 ‘열어보라’ 하신다. 어렵사리 열면서 조상들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비밀을 알기 전에는 절대 안 열린다. 대문 앞에서 앞을 내다보니 용두안 와둔지 가두둑 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김학균 가옥에서 나와 장막골로 들어선다. 장막골은 장막둔지라 하는데 둔지 위쪽에 언둔지라는 도드라진 언덕배기가 있다. 언이 있어야 할 자리인데 언은 보이지 않고 물이 닿을 것 같지 않은데 논이 있다.
  언둔지를 지나면 고양산과 아미산 삼형제바위 사이로 오르는 큰골을 만난다. 큰골어귀에는 정3품 ‘도정(조선시대의 무관직)’을 지낸 심형기씨의 선조부의 능이 있다.
  장막은 큰골자락이 펼쳐놓은 버덩이다. 장막길을 따라 휘돌아 내려오면 고양산 등산로 입구에 다다른다. 큰골개울을 건너 산 밑으로 돌아들면 강가에 닿는데 벼룩구미이다. 땅모양이 벼룩엉덩이를 닮았다하여 붙인 지명이다.
  고양산에 오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다시 장막둔지를 지나 서석 체육공원으로 향했다. 체육공원 입구에는 서석관문 아치가 세워져있고 관광안내도와 주차장이 있다. 공원이 들어서기 전에는 장마 때만 빼고는 강 한가운데 퇴적물이 둔치를 이룬 섬이었다. 버드나무와 달뿌리풀이 무성했다.
  체육공원은 2001년 3월 개원하였다. 간이운동장과 체력단련시설,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었다. 운동장은 천연잔디를 심은 축구장과 배구장·족구장·배드민턴장·테니스장 등이 있으며 철봉과 평행봉·매달려 건너기 구조물·엎드려 팔굽혀펴기대 등의 체력단련시설이 있다.
  편의시설로는 화장실 3곳과 가로등·벤치·식수대 등이 있으며 그네와 미끄럼틀과 같은 어린이놀이터도 갖추었다.
  체육공원은 서석을 전국에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연예인 축구대회를 비롯하여 면단위 체육대회는 물론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이어진다.
  지난 봄에는 공원과 어론 사이 강에 섶다리를 놓아 동심의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섶다리에 앉아 낚는 피라미 낚시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다.
  흘러가는 것들을 사진에 담고 섶다리를 건너고 건넌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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