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두리는 풍암리에 속한다. 풍암리의 섬 같은 곳이다. 숲이 있고 전설이 깃든 마을이다.
산 아래 자리 잡은 집 창문너머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일부러 밤 풍경을 보고 싶어 풍암 시장에서 순대국을 먹고 어슬렁거리다가 강을 건너 마을로 들어섰다. 청량에서 내려오는 물살이 자근자근 속삭이듯 흐른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달빛을 안고 흐르는 강물소리를 듣는다.
구김 없는 소리, 어디론가 흘러들어 젖는 소리,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는 소리를 귀에 담는다. 많은 물이 흐르는 것도 아닌데 아슴아슴하다. 자연스런 놀이터를 이루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물푸레나무와 신나무 버드나무가 적당히 그늘을 만들어주고 대여섯이 둘러앉아서 놀 수 있는 암반이 깔려있다. 마을 사람들이 다리 밑이라 붙인 쉼터다.
강은 물만 흐르는 게 아니다. 바람도 흘러가고 하늘도 흘러간다. 풍경은 풍경대로 남는다.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면 소나무 숲에 어리는 바람소리가 감미롭다.
마을 앞으로는 청량에서 흐르는 물이 감돌아 흐르고 마을 한 가운데로 지혜동에서 흘러 내리는 개울이 있다. 개울을 따라 소나무가 늘어서 골짜기로 이어진다.
오른쪽 버덩은 웃무터고 논이 펼쳐져 있다. 개울 건너 아래쪽은 부엉바위다. 부엉바위는 농로를 끝까지 따라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풍암시장 뒤뜰 강 건너편이다. 부엉이가 집을 짓고 살던 바위인데 설통(토종벌이 들라고 놓아둔 빈 통)이 많이 놓여 있다.
골짜기로 들어섰다. 마을공동 창고를 지나면서부터는 골말이다. 솔밭 사이로 개울이 흐른다. 예전에는 솔밭이 우거져 학이 날아와 집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농사짓는데 그늘이 진다고 다 베어냈다고 한다.
골말 안으로 들어서자 제법 큰 우사가 나온다. 사료값 인상으로 시름이 큰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들은 누워 되새김질이다.
골을 따라 쭉 올라가면 지혜동(지역골)이고, 오른쪽골은 터(토)골이다. 터골 안막으로 들어가면 여러 골짜기가 나온다. 배나무골, 산지당골, 설통바위골 그리고 석장골이다. 터골 뒷산은 동막산이다.
옛날 지혜동에는 박부자가 살고, 터골에는 김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김부자집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 홀로 남은 부인은 석장 속에 있는 노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어느 날 부인이 수레를 타고 횡성 쪽 친정에 가려고 지혜동을 지나 수렛재로 가다보니 박부자네 머슴들이 한마장(약 40미터)쯤 지게를 늘어놓고 위세를 부렸다. 친정에 다녀온 부인은 여종들을 시켜 솥뚜껑에 기름칠을 하여 한마장반 되게 늘어놓았다. 햇볕에 반짝이는 솥뚜껑을 본 박부자 내외는 기가 꺾여 부자자랑은 하지 않고 의좋게 지냈다고 한다. 석장골은 김부자댁 노 시부모가 살던 석장터에서 유래되며 지금도 돌로 쌓은 석장터가 남아 있다.
터골에서 나와 박부자 내외가 살았다는 지혜동으로 올라갔다. 골 안막까지 시멘트포장이 되어 있다. 집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전봇대가 서 있는 걸 봐서 누군가 사는 게 분명하다. 좀더 올라가니 불사암으로 오르는 길과 갈라진다.
불사암으로 오르는 골짜기는 길재골이고 비포장이다. 길재골로 들어가면 뱀장골을 지나 황정골로 이어진다. 나는 지혜동 마가리로 들어섰다. 포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골짜기 맨 끝에는 오성근(70)씨 댁이 있다. 오래된 집이다. 아직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화전살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쓰러질듯 기둥은 기울고 방안은 어두침침하다.
마당에 들어설 때부터 나는 다른 생각에 빠졌다. 하룻밤 머물며 모깃불을 피워놓고 산위로 돋는 달과 별 그리고 서로 살아온 시간을 풀어내면서 푸른 새벽이슬과 뻐꾹새가 우는 아침을 맞고 싶은 것이다.
한번은 소설가라는 사람이 찾아와 기(氣)를 받아간다며 마당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고 한다.
집 마당에 서서 눈을 들어보니 산마루가 이마에 걸린다. 골 안까지 훤하다. 두 골짜기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은 재집골인데 청량 한가마골로 이어지고, 왼쪽은 달박골인데 어론 황정골로 이어진다.
그럼 석장골 전설에 나오는 수렛재는 어디일까? 또 부자집에서도 고려장을 했을까? 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구전되어 내려오는 기록이라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그 흔적을 찾아보면 김씨부인의 지혜와 품성을 칭찬하기 위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한편 수렛재는 지금으로선 찾을 수 없다.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지혜동을 지나 횡성으로 갔다는 기록에 따라 재집골을 넘어 한(헛)가마골을 지나 먼드랫재를 넘었을 것 같다. 따라서 수렛재는 재집골에서 한가마골로 넘는 고개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 고갯마루를 지금은 수골등이라 하는데, 이 고개를 넘어 청량으로 간다고 하고 수레가 다닐 만큼 수목 사이로 난 길이 넓다.
감두리(甘杜里)를 돌아 나오면서 감두란 말에 생각이 이끌렸다. 말 그대로하면 단 팥배나무골이 된다. 그러나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 임진왜란인지 병자호란이지 분명치 않으나 군두리에서 쫓긴 군사들이 이곳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다 하여 감두리라 부른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순 없다. 다만 이야기의 폭을 넓혀보는 것도 마을을 찾는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청량에서 내려오는 개울 다리를 건너 풍암으로 들어섰다. 메지소(메주꾸미, 메지바위너설)를 지나 한 구비를 돌아 흐르던 자리는 지금 공원이 조성돼 있다. 그곳에 똥통소라는 항아리처럼 생긴 소가 있었는데 제방공사로 묻히고 말았다. 다리를 건너면 이반 뜰이다. 거지도 쌀밥을 먹었다고 할 정도로 이반뜰은 넓었다.
이반 뜰의 지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윤치호(정치가이며,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오고,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변절하여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네이버 사전) 였다고 한다.
윤치호의 어떤 기록에도 서석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럼에도 가을이면 마름집으로 소작인들이 싣고 들어오는 볏섬이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볏섬은 한양 윤치호 댁으로 실어갔다고 하는데, 그 마름집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서석 버스정류장 건너편의 유신상회가 그 자리였다고 한다.
재건중학교가 있던 자리는 지금 풍암리 마을 사무소가 들어서있다. 이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지금 오십대 중후반을 넘어섰다. 처음에는 서석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야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틈나는 대로 재건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이반뜰의 강가에는 ‘학소대’라는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학들이 많이 날아와 앉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물이 돌아나간 흔적만 남아있고 밤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곳에서 보면 중부다리(청량천과 생곡천이 합수머리)와 메지소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학소대에서 논길을 따라 나오면 2003년에 다시 쌓은 풍암제 방죽이다. 신 풍암 뜰이 펼쳐진다.
건너편 강안 부엉바위는 누구나 탐내는 석자리(벌통을 놓을 자리)이다. 오밀조밀 설통이 놓여있다.
부엉바위 아래는 사잇골(삵골)이고, 골어귀에 따개비처럼 설통을 놓은 골은 건넌골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 강물은 동막산 밑을 돌아 흐른다. 동막골 어귀까지 용두안 앞뜰의 제방이 이어진다. 풍암제 제방을 따라 내려오면 물은 양갈래로 갈라지고 그 가운데 서석 체육공원이 자리한다.
학소대를 지나 시내로 들어서면 서석초등학교와 서석중고등학교, 서석 성당이 있다. 성당 뒤쪽은 우뭇골이고 조가동 사이에 물안골이 있다. 조가동은 옛날에 조씨들이 모여 살았다하고 또 새들이 많이 날아와 지즐대며 노래를 부르던 곳이라 한다. 지금 조가동 어귀 둔덕에는 전주이씨 사당이 있으며 주막거리가 있던 자리에는 삼거리(내면↔횡성↔서석)가 생겼다.
지금의 풍암뜰은 이반뜰과 진수륵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이반뜰은 지금의 시장터와 그 뒤뜰을 말한다. 진수륵은 지금 진등모퉁이 앞뜰과 서석농협 경제사업소 앞뜰이 된다.
풍암은 아미산에서 내려오는 능선이 골을 이룬 마을이다.
잠깐 아미산에 대하여 부연한다. 아미산은 1997년 5월2일 홍천군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아미산(961m)은 바위가 거의 없는 육산(肉山 : 흙산)이면서도 산세가 당당하다. 서석면의 한 쪽에 병풍을 두른 듯 솟아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동쪽의 오대산(五臺山 : 1,563m), 남동쪽의 계방산(桂芳山 : 1,577m), 서쪽의 백암산(白岩山 : 1,099m), 남쪽의 치악산(雉岳山 : 1,288m)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표적인 봉우리로 바위 3개가 마치 뫼산(山) 자처럼 우뚝 솟아 있는 삼형제봉을 들 수 있는데, 아미산에서 유일하게 바위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아미산은 풍암과 검산을 품는 모산이다. 능선은 맺힌데 없이 마을을 품는다. 진등은 풍암의 등줄기가 된다.
성황당고개(지렁고개, 자작고개, 지령고개라고도 부른다)를 중심으로 면사무소 농협 새마을금고 우체국 등이 들어선 자리는 ‘지렁리’라고 하고 고개를 넘으면 ‘현하’다. 조선시대 때 군두리로 시장이 옮겨가기 전까지 현하에 시장이 섰다. 지렁리로 시장이 내려온 것은 일제 강점기 때라 한다.
지렁리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 할 정도로 진흙구렁이 고래실논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응고를 묻고 하수도를 내 도로를 내고 건물이 많이 들어섰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면사무소 근처 밭은 한 삽만 파도 물이 날 정도라고 한다.
봄부터 시작된 서석 시가지 정비 사업이 유월 중순이 돼서야 끝났다. 인도블록을 다시 깔고 포장도 말끔히 마쳤다. 큰길 뒤로는 서석의 재래시장이 4일, 9일에 서는데, 시장입구에 고향식당이 있다. 최근 드라마 ‘식객’의 촬영 장소이다.
오일장날에는 단골 장돌뱅이들과 생곡, 청량, 검산 등지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로 제법 큰 장이 선다.
나물이 나는 봄철에는 곰취와 두릅, 곤드래 나물을 사다 먹었다. 오디가 한창인 요즘에는 오디를 사다가 술도 담궜다. 마을마다 배나무 골이 있으니 올가을에는 돌배를 구해 술을 담아야겠다. 또 설통바위 골에서 꿀을 뜬다하면 한 병 사야겠다.
주로 토산품을 갖고 나오는 할머니들을 찾는데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제비가 처마 밑에 집을 짓는 대포집이나 순대국 집에 앉아 푸념 섞인 사투리도 엿듣는다. 땅이 풀리기가 무섭게 골골이 찾아다니는 산나물 채취꾼들 때문에 나물 뜯기가 힘들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앉아 도둑맞은 기분이라고 한다. 시장에서 들은 정감 어린 사투리는 백석의 시에도 나오는 ‘마가리’다.
지난 장에서는 ‘마가리’와 어울리는 솥단지를 만났다. 시장 한복판에서 올챙이국수를 먹는 중년의 얼굴에선 구수한 추억을 엿보았다.
‘마가리’가 그리운 것은 ‘느림’의 여유가 아닐까?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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