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거릿말’로 나와 ‘삼연대’로 들어섰다. 청량분교와 보건진료소가 마주하고 있다. 큰 뜰이라는 이름의 ‘거리’는 길을 사이에 두고 음지·양지로 나뉜다. 개울은 응달말의 논을 지나 산 밑으로 흐르고, 양지말은 수리봉과 연화봉의 긴 능선 아래 뜰을 이루고 그 사이로 실개천이 돌아 흐른다.
넓은 뜰은 동수교 다리까지 이어진다. 동수교부터 개울은 왼쪽 골짜기 물을 받으려는 듯 굽어진다.
다리를 건너면 ‘동두촌’이다. 청량에는 동수라는 지명이 없는데 다리에 동수교라 쓰여 있어 물어보았더니 ‘글쎄요’ 한다.
‘동두’란 서석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솔무정이라 했는데 소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들어와 화전을 일구고 살았던 시절, 동두는 마을의 중심이기도 했다. 버덩을 이루고 있다하여 ‘버덩말’이라고 한다.
분교(동두분교)가 있었고 ‘정규시(鄭奎時)’와 같이 효심이 지긋한 순박한 사람들이 살았다.
정규시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병환으로 고심하던 중 꿈에 신령이 나타나 하는 말이 ‘너의 부친은 백약이 무효하니 다른 방법은 없고 너의 넓적다리에서 살을 베어 정성껏 삶아 그 물을 약으로 드리면 즉시 완쾌할 것이다’라는 계시를 받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의식을 회복한 아버지는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여, 엄동설한에 앞 냇가 얼음 위에서 정성껏 기도를 올려 싱싱한 잉어를 구하여 봉양 하였다. 아버지는 장수하다가 돌아가셨고, 동네 사람들은 물론 문중에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1924년 2월 13일 효자비를 세웠다.
효자각을 돌아보며 자손을 물어보았지만 다 떠났다고 한다. 효란 마음이 아니라 몸에 배인 습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두에서 산 안막을 따라 오르면 삼연암과 면골이고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보리울’이다. 유난히 보리가 잘 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보리울을 따라 오르면 ‘운무산’으로 오른다. 올라가면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보리울이고 더 따라 오르면 배나무골이다. 배나무골을 넘으면 ‘삼근암 병목골’로 나온다.
원골을 따라 들어서자 운무산이 바로 보인다. 운무산에서 뻗어 내리는 능선은 작은 봉우리들을 보듬는다.
절터 골 입구까지 왔을 때, 젊은 아낙이 모자를 쓰고 경운기를 끌고 내려왔다. 이 골짜기에 얽힌 이야기 좀 들려달라 하니, 특별한 건 없고 절터골 안쪽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말등바위가 있는데 그 골에 고비가 많다고 한다.
보리울은 해가 늦게까지 비껴들었다. 발길을 돌려 동두에서 삼연대 쪽으로 올라섰다.
동두 솔골, 작은 솔골, 큰 솔골은 상군두리와 길이 닿고, 법밭너미는 생곡으로 가는 고개가 있다. 동두에서 보면 연화봉이 한 뼘 쯤 보인다. 심목골을 따라 오르면 연화봉인데 원래 이곳에 저수지를 막아 달라고 했으나, 골이 넓어 삼연대에 막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그랬다면 연화봉은 정말 연화부수의 명당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심목골을 지나면 물줄기는 갈라진다. 저수지 둑이 보이는 골이 삼연대고, 다리를 건너 솔 숲 사이를 지나 오르면 ‘면골’이다. 날이 가문 탓인지 개울에서 물이 뱀처럼 흐른다. 면골 안막에 천렵하기 좋은 자리가 있다하여 올라갔다. 임도(林道) 같은 산길이 나왔다. 이 길로 더 올라 가야하나 망설이는데 트럭이 내려온다.
‘끝가지 가보는 거지. 뭘 망설여?’
굽이굽이 돌아가니 계곡은 넓게 석축으로 제방을 쌓고, 공사 중인 펜션이 나왔다. 풀이 우거진 길은 계속 이어져 작은 면골, 큰 면골을 지나 ‘지장고개’를 넘는다하는데, 조금 허탈하지만 돌아설 수밖에 없다.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졌다. 많이 걸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배도 고프고 날이 저문 탓이기도 했다.
손전화를 열어보니 통화권이탈이다.

새 한마리가 날고 있다
애인이 떠났다는 소식은 알지 못했다
우체부는 산 구비를 돌아 사라졌다
더덕과 천마와 만삼이
저 홀로 넝쿨을 뻗어 길을 간다
뻐꾸기가 흘린 울음이
온 사방에 가득하다
저만치 환한 세상은 이 고요를 탐하지 마라
날은 곧 어두워지고
군불을 때며
감자를 삶아 놓고
내게로 찾아오는 어둠을 향하여
별의 소식을 묻는다
- 외딴집에서 보낸 하루 -

면골에서 나와 삼연대로 바로 올라갔다. 문자 메시지가 울린다. 통화권이탈 지역에서 통화가능지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원시 문명세계에서 현대 문명세계로 다시 들어온 느낌이다.
오후에 찾아뵙기로 한 이상진(75)씨 댁으로 가는 길이다. 집은 저수지를 지나 아스콘포장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 길을 따라 산 밑에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마당가에서 풀을 뽑고 계셨다. 마당에는 자가용이 세워져 있다. 오랜만에 시집간 딸이 왔다고 한다. 손님이 온다고 쑥 뜯으러 나갔다고 한다. 집 뒤 산 밑으로는 벌통이 놓여있다. 언제 벌이 날지 모르니 집을 비울 수가 없단다.
집은 남향의 ‘ㄴ’집이다.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니 외양간에서 소들이 벌떡 일어난다.
‘부리는 소인가 봐요?’
‘몇 해 전까지는 쟁기질을 해 비탈 밭을 다 갈았는데, 경운기가 들어오고선 안 부립니다. 나랑 산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새끼두 잘 낳아주어 애들 학교도 보내고 시집장가도 보내주었지요. 짐승이지만 맏딸입니다.’
안채는 주방과 안방, 윗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윗방은 할머니 방이다. 당뇨에 허리가 쑤셔 누워 계셨다. 통골 어귀에서 살다 장가들어 나오면서 집을 지었으니 오십년이 넘었다고 한다. 화전을 일구며 살던 때였고, 그나마 산 밑 버덩에 밭을 일구어 쫓겨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진씨는 삼연대에 얽힌 이야기부터 풀어 놓는다.
삼연대는 삼태기형상의 골이다. 옛날 고을 원님이 이곳에 와서 삼년을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무슨 이유로 원님이 이곳으로 왔는지는 모른다. 그때 원님이 넘었다하여 원넘이 고개라 하는데, 운무산의 왼쪽 낮은 능선을 넘는 고개다.
고개를 넘으면 ‘횡성 속실리’이다. 횡성이나 원주에 볼 일 보러 갈 때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속실에는 제법 큰 주막이 있었는데, 주모가 담근 옥수수 탁배기(막걸리)와 얼큰하게 말아주는 국밥이 정말 맛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주모가 청상과부인데다가 정도 많고 인심도 후해서 수작 한번 걸어보려고 일부러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바람피우러 갔다가 바람도 못 피고, 배만 골아 넘어온 사람들에게는 원이 맺힌 고개라는 뜻으로 ‘원넘이 고개’라고도 한다.
이상진씨가 설명해 준대로 골을 찾아 나섰다.
저수지 건너편 둔덕배기는 ‘덕두리’인데, 수몰되기 전 개울가에 살던 사람들이 둔덕으로 올라와 터를 닦고 살면서 생긴 지명이다. 원넘이 고개는 덕두리에서 넘어가는데 고개 초입에 ‘상대바위’가 있었다 한다.
상대바위를 지나면 벌막골이다. 양봉을 치던 사람들이 들어와 한여름을 보내던 곳이라 하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양지바른 산 밑이나 벼랑에 토종벌이나 설통(벌이 들 빈 통)을 치고 있어 외지 양봉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이 지역에서 따는 꿀 중에 갈꿀이 유명하다.
‘벌막골’은 ‘수리바위’를 중심으로 ‘직골’과 ‘통골’로 갈라진다. 수리바위는 독바위(항아리를 닮은 바위)라고도 하는데, 꼭 독수리가 마을을 지켜주는 듯 앉아 있는 모습이다. ‘통골’은 대골-큰통골-속실-뱀막으로 이어지고, ‘직골’은 배나무골-도실암-화채봉으로 이어지는 ‘원골’과 ‘박달고지’ ‘절터골’로 갈라진다.
직골은 ‘쇠판이’이다. 주로 중석을 캐냈다. 지금도 산기슭에는 광산굴이 많다. 직골 어귀에는 쇠를 뽑아내던 가마(용광로)도 있었다하는데, 질 좋은 중석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삼연대저수지를 지나 내려오면서 청량산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거리말로 나와 서근바위 쪽으로 올라가다 하상계길 이정표와 청량산 청량사라는 안내판을 보았다.
하상계는 거릿말 강 건너편이다. 하천을 막은 제방과 산발치를 따라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다리를 건너 청량사로 들어갔다. 청량사는 지금 불사를 이루는 중이라 부처만 모신 민가였다. 청량산에 대해서 물으니 절 뒤의 산을 그냥 붙인 거라 했다. 원래 청량산은 서석에 없었다. 다만 연도를 알 수 없는 청량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청량리도 여기서 유래한다.
노쟁이(노장촌)와 서근바위(삼근암) 면골과 삼연대의 물길은 하상계를 돌아 감두리로 흐른다.
감두(甘杜)에는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청량에서 다리를 건너 감두리로 들어왔다. 농로가 한 길로 쭉 뻗어 있다. 논에서는 분얼(가지치기)이 한창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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