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다. 날씨가 청명하다. 오랜만에 물걸리를 돌아 청량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강에는 가족과 함께 놀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과 함께 물고기도 잡고, 여자들은 물에 몸을 담그고 다슬기를 줍는다. 여름이면 익숙한 풍경이다.

차도 강가에 들어선다. 짐이 많은 탓이겠지만 강에까지 차가 들어간다면 문제다. 물걸리를 지나오면서 어림짐작으로 헤아려도 백여 대는 넘는 것 같다. 세차도 하고, 쉬기도 하고, 불도 피우고, 고기도 굽는 편리함이 있겠지만 강을 생각한다면 끔찍한 일이다.

청량 거릿말을 들어서는 길옆에 서너 아람 됨직한 커다란 나무가 서있다. 안내판도 없지만 홍천군에서 지정한 ‘풍년수’라는 보호수다. 길옆이며 논밭 근처라 마을의 쉼터이다. 그늘에서 참을 들고 있다. 때마침 나는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서부터 비료 값, 사료 값에 부족한 일손까지 푸념을 늘어놓는다. 공공근로 사업을 계절에 따라 농민들에게 지원해주면 어떨까 생각하면서 일어났다.
그때 청량분교 뒤에 오독하니 선 산위에 정자가 보였다. 내친김에 올라갔다. 야트막한 바위산이었다.

정자각 현판에는 청원각(淸元閣)이라 쓰여 있다. 1930년대 세워진 산신각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8년에 복원하면서 청원각이라 붙이게 됐다. 이름이 바뀌게 된 데는 의병장 김덕원과 관계가 있다. 장두 김덕원의 조부가 이 마을에서 잠깐 살았다고 하는데서 연유한다. 현대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듣는 듯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마을에서는 청량각으로 부른다.

삼연대와 면골 보리울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줄기는 동두촌 거릿말을 지나 흐른다.

다리를 건너면 삼근암이다. 운무산이 에두른 마을이다. 삼근암은 서근바위라고 한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썩은 바위로 들린다. 삼근암에는 바위가 유난히 많다. 옛날 이 마을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근 수가 많이 나가겠지 예상하고 달아보았더니 세근 밖에 안 나가 그 후로 서근바위라고 부르게 됐다 하며, 또 팔 척 장신의 장사가 바위로 공기놀이를 하다가 산위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마을이다.

길은 구불구불 돌고 돈다. 삼연대에서 흘러오는 수로가 산 밑으로 돌아 이어진다. 삼근암은 불근대기와 골짜기를 이루는 마을이다.
마을로 들어서니 비닐하우스가 눈에 든다. 하우스 안에서는 고추모종을 심느라 눈길 한 번 안준다. 주로 청량고추와 아삭이고추를 풋고추로 출하하는데, 올해는 유독 날씨가 변덕을 부려 보온에 힘쓰고 있다. 오늘은 김종산 씨댁의 고추 모종을 하는 날이다.

거들어 준답시고 고추모를 심으며 삼근암의 구경거리를 물었다. 대뜸 운무산(雲霧山)을 꺼낸다. 마을 사람들은 운무산을 율미성이라고 부른다. 율미성은 진한 시대의 태기왕과 관련이 깊다. 태기산에 있던 왕이 공격을 받아 율미성으로 피신을 하며 재기의 기회를 엿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운무산은 암봉의 아름다움과 아기자기한 능선을 갖추고 있어 아름답다. 구름과 서리가 내린 듯한 980m의 아담한 산이다. 삼근암을 오르면서 보면 중절모자를 쓴 듯하고 또 밤송이 속의 세알박이 알밤처럼 보인다. 세 개의 암봉은 등산의 묘미를 더해준다.

예전에는 암봉과 암봉을 연결하는 통나무 다리가 놓여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위를 끼고 올라야 한다. 정상에서는 홍천-횡성으로 물결쳐 뻗어 내리는 산맥의 파도와 둥지를 튼 산촌의 아기자기한 삶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봉우리 정상에는 샘이 난다. 손으로 떠 마시는 물 한모금은 힘든 산행 끝에 가슴을 적시는 감로수다.

지금은 먼드랫재에서 오르는 임도를 따라 등산을 하지만 삼근암에서 운무산을 오르는 등산로를 개설한다면 새재-암봉-치마바위-벌막골-삼형제바위를 돌아오는 산행은 청류와 참나무가 울창한 원시림 속의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조용하고 쾌적한 산책로가 될 듯 싶다.

운무산을 중심으로 삼근암에서 횡성 성골과 속실로 넘는 고개가 둘이 있다. 김경호(73)씨댁 앞에서 왼쪽 벌막골을 따라 올라 넘는 원너미 고개와 오른쪽 지당을 지나 넘는 샛재다. 지당은 서낭당인데 아름드리 엄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있고 그 앞에 당이 서있다. 당제는 칠월칠석에 올린다.

삼근암은 버덩이 없다. 산비탈에 묻힌 돌을 골라 논둑 밭둑을 쌓았다. 고단한 화전민의 삶이 남아있다.

삼근암은 분명 있다. 벌목골 입구를 따라 오르면 삼형제처럼 자리 잡은 바위가 있는데, 장수가 가지고 놀던 공깃돌 같다. 바위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면서 선녀의 목욕탕인 듯한 소(沼)를 이룬다. 올챙이와 도롱뇽이 나뭇잎을 집삼아 헤엄치고 있다.

개울은 콘크리트제방을 쌓아 하천정비를 했고 안쪽에는 석축을 쌓아 정비를 했다. 그러나 며칠 이어지는 봄비에 쌓았던 석축이 무너진 곳도 있다.

벌막골과 지당골에서 내려오는 물은 병목골에서 만나고 화리골과 훈장이 살았다는 훈장골, 숯을 구웠다는 한가마골을 만나 청례골, 뒷골, 장막골을 거쳐 노장촌에서 내려오는 물과 만난다.

거릿말로 나와 서근바위 쪽으로 올라가다 하상계길 이정표와 청량산 청량사라는 안내판을 보았다. 하상계는 거릿말 강 건너편이다. 하천을 막은 제방과 산발치를 따라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다리를 건너 청량사로 들어갔다. 청량사는 지금 불사를 이루는 중이라 부처만 모신 민가였다. 청량산에 대해서 물으니 절 뒤의 산을 그냥 붙인 거라 했다. 원래 청량산은 없었다. 다만 연도를 알 수 없는 청량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청량리의 유래도 청량사라는 절에서 비롯되었다.

청량에는 숙종(조선의 제19대 왕-1674~1720 재위)과 얽힌 사연이 있다.

민정사찰을 나온 숙종은 청량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왕은 이곳의 별식인 올챙이묵<옥수수를 주원료로 하는 음식-서석 와둔지(홍천 서석에서 인제 상남 가는 국도변) 약수터에 가면 한 여름철 맛 볼 수 있는 올챙이 묵(올챙이국수)이 있다>을 대접받으며 촌로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이튿날 왕이 떠나면서 ‘한양에 오거든 큰 대문이 달린 이서방의 집을 찾으라’고 노인에게 일러주었다. 그후 노인이 꿀단지를 싸들고 이서방의 집을 찾아 며칠을 머문 후 이 서방이 써준 봉서를 가지고 내려왔는데, ‘선대부(善代夫)’로 명한다는 왕의 친필이었다. 나중에야 촌로는 그가 숙종 임금임을 알고 그 뜻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가문의 보물이며 영광일 수 있는 촌로는 청량 어디에 살았는지 또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순박한 마음은 우리들이 가져야 할 삶의 여유이다.

길 떠난 나그네에게는 두고두고 기억될 더 없이 소중한 보물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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