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제골을 돌아 나왔다. 옛날에는 구불구불 돌아 흘렀을 개울이 직선으로 흘러내린다. 그늘을 드리운 나무도 없고 아이들 물 놀이터도 없다. 흐르는 물을 막아 양수기를 대고 물을 퍼 논에 댄다. 다시 국도에 올라섰다. 논 사이로 강을 건너는 다리가 보였다. 다리를 건너면 군두리다. 왼편쪽 소나무 숲이 있고 사이에 비석이 서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 위에 세워졌다. 글씨는 다 지워지고 알아볼 수 없다. 지금은 비석 뒤쪽으로 묘를 쓰고 비석까지 세우고 단장을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다.
군두리는 뜰이 넓다. 연화봉, 수리봉의 줄기가 마을 뒷산을 이룬다. 뒷산은 말 등 같이 생겼다하여 ‘마산’이라 부른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때 군 숙영지를 만들어 군대가 주둔했다고 하여 군두라 한다. 자연히 큰 마을이 생겼다.
삼생초등학교도 처음에는 군두 여내골에 세워졌다. 그러다가 도찬동 지금의 방앗간 자리로 옮겼고 다시 현재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수리봉에서 이어지는 넓은 산자락에는 금정굴, 갈밭골, 진등, 약물골, 진골, 번안골, 여내골, 솔골이 있지만 실한 물줄기가 흐르는 골짜기는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때부터 간촌에 보를 막고 물을 끌어 왔다. 그 보는 중보다. 지금 군두 뜰을 적시는 물은 상보(저수지물), 중보, 하보(용터 아래 미약골 물)를 따라 흘러든다.
옛날 서석에 장이 선 건 풍암리 현아였다. 그러다가 군두리로 옮기게 된다. 지금 지령리(풍암리)에 시장이 선 것은 광복후의 일이다. 군두리 구시장은 여내골 자락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마을 회관과 교회 아래쪽이다. 다리도 없던 시절에 미약골과 피리골, 검은산골(검산)의 물이 모여 흐르는 물이니 물도 많았고 강도 넓어 장꾼들은 봇짐을 이고 지고 개울을 건너다니는데 어려움이 많았겠다.
강가에는 듬성듬성 버드나무가 서있고 강변에 제법 큰 집들이 보인다. 강둑을 따라 예술인촌 뒤까지 올라왔다. 물가에 달뿌리(억새나 갈대와 비슷하다)가 파릇파릇 싹을 내밀고 있다.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호들기를 만들어 분다. 머리에 깃을 꽂은 신사 같은 철새 후디티가 논두렁에 앉았다가 놀라 날아간다. 이반보의 물고가 시작되고 들미나무보의 물꼬가 시작되는 응고를 다시 둘러본다. 응고가 묻힌 곳은 보이지 않고, 지금은 강에 콘크리트로 보를 막고 수로를 냈다. 도랑에서 미꾸라지나 버들치를 잡는 일도 없다. 더욱이 도랑치고 가재 잡는 일도 없다.
옛날부터 강은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소풍장소였다. 봄 농사가 끝나면 강으로 천렵을 갔다. 이 강에도 그런 기억이 남아 있다. 무당소와 메주꾸미다. 무당소는 지금 서석 옥수수찐빵집 뒤인데 바위 아래로 물이 감돈다. 그전처럼 물이 깊진 않지만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자주 찾는 밤 낚시터다. 옛날에 바위 위에서 굿을 하던 무당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그리 부른다고 한다.
무당소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풍덩소다.
쇠목소(沼)도 있었다. 소(沼)근처에 소(牛)를 매어 놓으면 물속에 있는 구렁이가 소를 잡아먹고 고삐만 남겨 놓는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유래는 알수 없다.
다리를 지나 제방을 따라 내려오면 메지소다. 아미주유소 뒤편 아래쪽이다. 메지소라 하면 잘 모르고 메주꾸미라 하면 금방 알아듣는다. 메주꾸미는 바위너설의 너럭바위다. 삼백여명이 올라가서 놀 수 있었다고 한다. 강물은 바위너설 사이를 휘돌아 흘렀다고 한다.
이곳은 초등학교, 중학교의 단골 소풍장소였다. 유년의 강은 기억 속에 흐르는데 모습은 없다. 물이 깊고 물살이 휘감겨 늘 위험이 뒤따랐다. 해마다 사람이 빠져 슬픔을 주기도 했다. 꺽지며 메기도 많았다.
비가 오지 않으면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 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바위위에 모여 개를 잡고 닭의 피를 뿌리며 제를 올리면 비가 쏟아져내려 모를 다 냈다고 하고, 면에서도 날이 가물면 면장이 나와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장마가 지면 세 골짜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살이 더 거셌다. 그 물살에 논이 떠내려갔다. 저것만 없으면 이 난리를 치루지 않아도 될 텐데 하던 차에, 생곡에 저수지를 막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을사람들은 메주꾸미 너럭바위를 깨서 석축으로 쌓아주면 좋겠다고 민원을 냈고, 공사장에서는 메주꾸미를 폭파시켜 생곡 저수지를 막았다고 한다. 그때 뚫었던 난폭 구멍 자국이 남아있다. 그 후로 마을에는 물에 빠져 죽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깨고 남은 바위 암반 위에 제방을 쌓아 자취는 사라졌지만 물은 그때의 기억처럼 흐르고 있다. 지금 그 바위가 있었다면 강가의 풍경과 물소리가 어울리는 관광명소가 되었을 듯싶다.
그런 기억만 남아 있을까? 유년의 아름다운 기억은 모천을 찾아 회귀하는 연어처럼 자신의 삶 속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꿈의 모티브가 되고 삶의 뿌리가 된다.
고향이 낯설어질 때는 사람의 인정이 메말라서가 아니다. 고향에 대한 기억의 상실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고향이 있는가? 우리의 아이들은 고향이 있는가? 병원에서 나고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생의 공간을 고향이라 할 수 있을까? 강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고 고향에 대한 추억은 내 삶의 거울이며 울림이다. 푸른 산 맑은 물의 고향, 홍천의 미래는 바로 산과 물이다. 오래오래 머무르며 자연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강에서 사라진 메주꾸미는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래도 메주꾸미가 있던 강을 자꾸 뒤돌아보며 예술인촌을 들어섰다. 예술인촌은 예전에 송어를 키우던 양식장이었다. 관리사와 콘크리트 수조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서울에서 그림 도자기 목각을 하던 이평우씨가 이 공간을 이용하여 체험공간으로 탈바꿈 시켰다. 처음엔 나무와 흙으로 아담한 집을 지었다.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또 꿈도 많아졌다. 결국 머무르며 즐길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지금과 같은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머지않아 꽃들이 피어 눈길 발길 머무르는 휴식처로 거듭 나길 바라며 예술인촌을 빠져나왔다.
예술인촌 건너편 국도변. 눈길을 끌만한 바위산이 있다. 큰 바위가 벽돌을 쌓듯 얹혀있다. 바위 틈새마다 소나무가 자라고 있고, 진달래가 곱게 피어있다. 가까이 가보니 길에선 보이지 않던 안내판이 서있다. 이왕 세우려면 길에서도 잘 보이게 세웠으면 어떨까?
안내판에는 아들바위의 전설이 쓰여 있다. 지금부터 오백년 전쯤에 딸만 셋 둔 아낙이 있었는데, 시부모와 남편에게 구박을 받게 되었다. 고민하던 아낙은 어느 날 밤 꿈을 꾸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이 바위위에 돌을 던져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다음날 아낙은 돌맹이를 던졌고 운 좋게 세 개를 얹었다. 그 후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아들바위라고 한다. 걸어서 학교 다니던 시절에 검산 생곡 사람들은 돌을 던져 보기도 하고, 바위 난간을 타고 지나가기도 했다 한다.
아들바위 꼭대기에는 돼지모양의 바위가 있고, 방아확처럼 움푹 팬 곳이 있다.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아들하나 점지해달라고 돌을 던졌다. 휙-
용오름 마을을 들어섰다. 검산2리를 그렇게 부른다. 2003년 새농촌 건설 사업으로 강원도의 지원을 받고, 정보화 마을로 지정되면서 바꾼 것이다. 용오름은 폭포산에서 온 이름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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