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부치’ ‘진펄’ ‘마당대기’를 찾는 데는 즐거움이 컸다. 그 마음으로 강물줄기를 따라 하루 멀다하고 나섰다.
홍천강은 맑은 물과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있어 사계절 찾는 곳이다. 그러나 백사장은 찾기 어렵고 홍천구경(洪川九景) 뿐만 아니라, 물골안 유원지, 눌언동 유원지 등 홍천강 상류지역의 강은 여기저기 쌓인 돌무더기로 사람들의 발길에서 멀어지고, 포크레인과 대형트럭이 분주한 골재 채취 현장만 자꾸 만나게 된다. 씁쓸할 뿐이다. 옛 지명들은 점점 사라지고, 새로이 들어서는 건물들과 상업적인 이름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부터 나는 마을을 감고 도는 물줄기를 따라 잊혀져가는 고을 이름과 추억들을 간직한 토박이들을 만나러 떠난다. 피리골로 들어섰다.
미약골을 흐르는 물줄기는 개울이었지만 장골. 고분대월의 골짜기와 만나는 ‘광수동’(너랫물)은 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강폭도 커지고 하천정비도 잘 되어 있다. 강물은 ‘용터’ 앞을 지난다. 눈 내린 한 겨울에 뱀이 기어간 자국을 따라가다가 뱀이 들어간 굴을 파보니 샘이 솟았다 하여 ‘용터’라 한다.
나는 용터를 지나 도찬동을 지나 생곡 저수지로 올라갔다. 마을 회관이 서있는 이곳은 ‘간촌(사잇말)’이라 부르는데, 마을사람들은 생곡2리라고만 한다. 이곳은 의병장 박장호(朴長浩)의 삶이 남아 있는 곳이다. 박장호는 황해도 출생으로 호는 화남(華南)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유인석(柳麟錫)·홍재학(洪在鶴) 등과 함께 수교의 부당함을 상소(上疏)하였으나 결국 일제에 합병되어 1905년 강원 홍천(洪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동지방의 의병대장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고국에서 망명해 온 각계 대표 500명으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그 도총재(都總裁)로 선임되어 1922년 일제의 주구 김헌(金憲)에게 암살되기까지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살던 집터도 삶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독립을 위해 외친 함성은 봄빛처럼 푸르게 살아나고 있다.
저수지 퇴수로에는 물이 넘쳐흘렀다.
‘간촌’은 저수지 아랫마을이다. 밀양(密陽)박씨의 집성촌이었고, 효자각을 하사받은 효자골로 통하는 마을이다.
효자각은 ‘간촌’에서 건조장을 하는 ‘박만옥’씨의 집 왼편에 서있다. 박만옥씨는 자신의 증조부 되시는 분이라고 했다. 종손은 지금 여주에 나가 살고 있으며, 마을에서 일 년에 한번 단장 겸 청소를 한다고 했다. 효자각은 1978년 마을 주민들과 밀양박씨 친족들이 세웠다.
‘박효치는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동안 시묘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자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어 어머니의 병간호에 정성을 쏟았다. 좋은 약과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니며 수발을 들었으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10년, 긴 세월에 눈살 한번 찡그리지 않는 그의 정성과 효성에 마을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따뜻하게 해드리려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있는데 방안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전보다 더 거칠게 들려 방으로 들어가 보니 어머니의 숨이 고르지 못하고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지고 손도 싸늘해지고 있었다. 그는 얼른 밖으로 나가 낫으로 왼손 무명지를 잘라 어머니의 입에 피를 넣어 드렸고, 그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정신을 잃었다. 이런 그의 효심에 하늘이 감동하였는지 어머니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그 후 20년을 더 사셨다’고 한다.
또한 효자각 왼편에 대리석에 새긴 ‘새마을 할머니 박봉녀’의 기념비가 있다. 6·25사변으로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와 어린 두 딸을 부양하며 모은 재산 중에 대지를 마을에 희사하셨다는 내용이다.
부모를 위해, 이웃을 위해 정성을 다한 이들의 선행에 머리가 숙연해졌다.
저수지를 돌아 올라간다. 물이 가득했다. 제방 둑에서 마을 안을 보니 나팔처럼 보였다.
이 고을에서 태어나 나이 들도록 이곳에 사시는 어른을 물으니 지장동 김학준(83)씨를 가르쳐 준다.
저수지를 끼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골짜기가 피리를 닮았다하여 피리골이라 하고, 또 피리를 불며 전쟁을 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마을이다. 그러나 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진한(辰韓)시대에 태기왕이 신라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태기산(태백산맥의 지맥)으로 숨어들어 한을 품고 힘을 기르던 중, 이곳으로 내려와 퉁소를 불며 마음을 달래던 곳이라 하여 생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저수지를 끼고 돌아가니 저수지 가에 오막살이가 있다. 산림감시원이 산다고 했다. 진달래가 무더기 무더기 흐드러지게 핀 산을 보면서 물결에 떠밀려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골짜기가 나왔다. 큰 다릿골이다. 계곡에는 개들이 목줄이 매인 채 짖는다. 한 구비를 돌아가자 햇살 받은 산 밑에 토종벌통이 보였다. 가까이 가니 벌들이 들락거리며 꽃가루를 묻혀 온다. 작은 다릿골을 지나 올라가니 산 밑에 빨간 지붕의 함석집이 눈에 띤다. 문 앞밭에서 아주머니가 쏙새(씀바귀)를 캐고 있다. 4대를 이어 여기에 살고 있다고 했다. 봄 햇살에 까맣게 탄 웃는 얼굴이 곱다. 천렵하기 좋은 곳을 알려달라고 하자 웃기만 하신다. 왜 웃냐고 하니까 이곳에서는 주로 검산리 쪽으로 간다며 그곳이 물이 좋다고 한다.
여름이면 가끔씩 아저씨가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잡아오신다고 하는데 피라미 붕어 잉어가 많다고 낚시질 한번 오라고 한다. 한때 이 저수지에서 빙어낚시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른 봄 산란기를 맞은 빙어들이 계곡을 따라 이동을 하는데 마을사람들이 모두 잡아 먹어 지금은 씨가 말랐다고 한다.
마을 중간에 회관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어 물었더니 옛날에는 4-H회관이었는데 지금은 아이들을 위한 도서실, 공부방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공부할 아이들이 없어 관리가 잘 안 된다고 했다.
저수지물이 많이 차올랐으나 흘러드는 물줄기는 많지 않았다. 물이 드는 골짜기가 깊이 패여 있고 암벽이 들어나 있다. 그 위로 소나무가 잘 가꾸어져 있다. 여름에는 시원한 놀이터가 될 듯싶어 김학준(83·지장동에 삶-생곡2리에서 최고령)씨께 여쭈었더니, 놀러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옛날에는 그곳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저수지 물이 차오르고, 사람들도 마을을 떠나면서 서낭당은 없어졌다고 한다. 박씨 문중에서 거기에 묘를 썼는데 지금은 소나무 숲이 물 가운데로 들어와 있고 또 남의 묘 앞에서 천렵을 하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아 가기가 그렇다고 했다.
저수지를 지나 ‘지장교’를 건너면 ‘지장동’이다. 지장동의 지장은 자작나무를 말하는데 지장동에서 청량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몇 백 년 묵은 자작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지장고개’라고 한다. 그러나 피리골로 들어서면서 ‘생비’(불교에서 말하는 생불 : 마을에서는 상비라고도 부른다)라는 지명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지장’은 ‘지장보살’과 관련지어 나온 지명이 아닐까 생각된다.
‘생비’는 ‘지장동’을 지나서 ‘배나무 골’과 갈라지는 왼쪽 골짜기다. ‘생비’는 ‘절터골’(절골)이라고도 하는데 지금도 그곳에는 ‘중의 단지’(사리함 혹은 부도탑)가 남았다고 하고 부도탑 지대석도 남아있다고 한다. ‘생비’에는 지금 아무도 살지 않지만 옛날에는 두 개 반 정도의 인가가 살았다고 한다. 생비에는 동학군의 비애가 서린 곳이라고도 한다. 불발현(불바라기-마당대기로 가기도 하고. 평창 흥정리로 넘을수 있다)을 넘어온 동학군이 이곳에서 잡혀 생매장되었다고 하는 곳이다.
생비는 두 골짜기가 만나는데 한 골짜기는 ‘고분대월 마가리’로, 한 골짜기는 ‘먼 골’로 이어지고 ‘먼 골’을 따라 올라가면 ‘할미자리’(지금은 평창군 봉평면)약수로 이어진다.
다시 배나무골로 들어선다. 갈수록 골이 깊고 가파르다.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과 맞닿은 능선이 어서 오라는 듯 길게 팔을 벌리고 섰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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