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골을 나왔다. 아침에 흐렸던 하늘이 서광동을 들어서면서 햇살을 비추더니 저녁때가 되어 해가 아미산 위에 걸린다. 논보다 밭이 많은 골짜기에선 비닐 씌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다리를 건너면 왼쪽으로 골짜기가 보인다. ‘서광동’이다. ‘서광’은 매봉산(이 마을에서는 매봉산이라 부른다)줄기의 골짜기이다. 산 능선이 에두른 골이다. 지금 그 어귀에는 아담한 집이 들어서 있는데, 집 앞을 지나려니 주인이 나온다. 들어와서 차 한 잔을 하고 가란다. 차를 마시면서 서광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런 유래가 있느냐고 놀란다. 주말이면 이곳에 와서 기를 받아간다면서 꼭한번 올라가 서광동의 전설을 찾아보겠다고 한다.
옛날 한 선비가 벼슬을 버리고 명산을 찾아 떠돌던 중, 이곳에 빛을 내는 암석이 많아 서광동(瑞光洞)이라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서석(瑞石)이란 지명의 유래는 서광동에서 찾을 수 있다. 서석(瑞石)이란 지명은 광주광역시의 무등산자락의 마을에도 있다. 하늘의 신께 제를 올리는 제단을 서석단이라 하는데, 이곳 서광동 안쪽에 가면 제단처럼 생긴 바위가 있고, 햇살이 들면 빛을 내듯 반짝인다고 한다. 암반이 깔린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깊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물줄기는 두갈래로 갈라지고 낙엽송 밭이 이어진다. 한때 화전민이 살았던 흔적이다. 물길이 갈라지는 둔덕바지에 바위가 보였다. 그러나 숲이 우거지고 흙에 묻혀 단의 형상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찾아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내려왔다.
굽이를 돌아 올라가면 생곡휴게소가 나온다. 생곡휴게소 위쪽마을은 상대월이고 아래쪽은 하대월이다. ‘상대월’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한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던중 이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 길을 잃게 되었는데 산을 바라보며 시(詩)를 지어 부르자 둥근달이 밝게 떠올라 길을 밝혀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마을을 상대월(上大月)이라고 하게 되었다.’
다시 국도를 따라 내면 쪽으로 오르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골짜기들은 ‘작은느쟁이’ ‘큰느쟁이’이고, 또 길이 굽었다고 하여 ‘구부소’라 하는데, 입구에 ‘성황당’이 있다. 마을사람들이 톱으로 송판을 켜서 세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건강, 무병장수를 기원하여 세웠다고 한다. 특히 산짐승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모여 고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상대월·미약골·장백골 사람들과 하대월 사람들이 모여 봄, 가을에 두 번 고사를 지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사람들도 몇 안 돼 날을 받아 지낸다고 한다.
성황당을 지나 오르다보면 길 왼편쪽에 땔나무를 잔뜩 쌓아놓은 집이 보이는데, 바로 이근재(70)씨 댁이다. 집 앞으로 보이는 골짜기는 장백골이다. 장가들어 이곳으로 세간을 났는데 선친께서 손수 깎아 만든 나무그릇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가 그리운 것은 이웃에 대한 정 때문이라고 한다. 화전을 일구고, 나물을 뜯으며 배고픔을 견뎌냈지만, 요즘처럼 사람이 그립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물 좋고 공기 맑은 골짜기를 찾아 들어와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생활방식이 다르고 종교관이 달라서, 산에 기대어 살아온 토박이들과는 거리감이 있다고 조심스레 털어 놓는다.
사람이 넘쳐나지만 사람이 그리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쓸쓸해짐을 느꼈다.
다시 국도를 따라 오르면 상대월 쉼터와 미약골 휴양촌을 지나게 된다. 쉼터는 인적이 뜸한 겨울엔 문을 닫는다고 한다. 휴양촌이 들어선 골짜기는 ‘성지개월’이다. 개월은 개울의 사투리다.
조금 더 올라가면 왼편쪽으로 골짜기가 보이는데 작은 송이밭골이다. 송이밭골은 매봉산으로 이어지는데, 왜정 때 그 능선 너머(멍데이골 쇠판이) 철광에서 철을 캐내어 이곳 송이밭골 어귀에서 풍구질을 하여 철을 녹였다고 한다. 지금도 그 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건너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약수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 곱새가 이 약수를 마시고 허리를 폈다고 하는데, 한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고 겨울에는 언 손이 녹을 만큼 따뜻하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물을 떠다가 마신다고 한다.
미약골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미약골 어딘가에 삼정승 육판서가 나올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이 죽으면 미약골에 묻었다고 한다. 미약골 안내 표지판이 서있는 아래쪽에 무덤이 있는데, 해마다 누군가 와서 벌초를 한다고 한다.
이 고을 사람들은 미약골을 미암동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언제부터 미약골이라 불렀는지, 그 유래는 알지 못한다.
미약골이란 지명은 전국에 많이 있다. 분명 지명에 대한 유래가 있을 법도 한데 미약골은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을 지명의 유래에 관한 자료를 갖고 있다는 김진택(아름다운 교회 목사)씨를 찾아가 미약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미약’이란 말은 일본에서는 ‘신전 또는 신성시된 곳’을 말한다면서, ‘모두부치’를 중심으로 불바라기와 노고산(할미자리)에 얽힌 신화적 요소를 연관 지어 볼 때, 분명 미약골은 신성시해야 할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나는 촛대바위니 암석폭포니 마당대기니 진펄이니 하는 이름들을 불러냈다.
2008년 4월 미약골은 자연 휴식년제로 조용하고 깨끗하다. 그러나 요즘도 삼을 캐러 몰래 들어가는 외지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또한 휴식년제가 해제되는 2009년 6월이면 미약골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잦아질 것이다.
따라서 푸른 산 맑은 물의 고향 홍천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원시생태계와 수질보전, ‘진펄’에서 발원하는 홍천강의 맥, 또한 ‘모두부치’ ‘마당대기’ ‘미약골’의 가치를 극대화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글·사진 허 림(시인)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