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흐리고 비가 왔다. 쉬지 않고 뱃재고개에 올라서니 간간이 눈발이 섞여 날린다. 해발 600미터의 뱃재는 아직 봄 몸살을 앓고 있다. 철이 철이니 만큼 비닐 씌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감자를 심을 거라고 했다.
다시 돌아 ‘구부소’에 사는 이근재(70)씨 댁을 찾았다. 마당에는 땔나무로 쌓아놓은 참나무 등걸이 가득하다. 한편에는 말코지를 깎아 세워놓았다. 마당 안쪽에는 외양간이 있고 개집이 있다. 낯선 발자국 소리에 뭐라고 짖다가 꼬리를 흔든다.
“할아버지, 또 왔어요” 문을 두드리자 “뉘요?” 문을 연다.
점심을 드시는 중이었다. 들어와 같이 한술 뜨자고 손을 잡아끈다. 먹고 왔다고 하자 그럼 냉수라도 들라고 한 대접 권한다. 인심이란 밥그릇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가진 것만큼 나누려는 노부부의 마음이 고맙게 느껴진다.
이근재씨는 나이 들어 마당대기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사람이 그립지 않았지. 요즘은 사람이 그리운 거야. 자식들도 곁에 있을 때 자식인 거야. 일 년에 겨우 두세 번 찾는 고향이 된 거야. 변하지 않은 건 물 맛뿐일 게야.’
변하는 것들 앞에서 이제 남은 것은 마음에 남은 기억들뿐이다.
‘미약골로 천렵을 간적이 있었지. 주로 산버드쟁이(버들치)하고 산뚝지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었지. 가재도 많았는데,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나서는 이상하게도 없어지더라구. 그 맛은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아. 올여름에 한번 오라구. ‘모두부치‘도 한번 가고 싶구 말이야.’
‘모두부치’는 ‘삼 개 군(인제군·평창군·홍천군)이 붙어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내면은 인제군에 속해있던 땅이었다. 그때도 ‘모두부치’라 불렀다. 평창 흥정리 사람들도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다.
지도에는 산 높이만 나와 있고, 이름은 없다. 한국전쟁 때는 그 고지를 두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마당대기 전투에서 살아남은 강문백(76)씨는 인민군유격대와 홍천7연대와의 마당대기전투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인민군과 아군이 서로 엉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온 산이 시체로 뒤덮였다고 한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은 열 명 정도였다고 그때의 일을 들려주셨다.
또한 동학군들이 ‘모두부치’를 넘어 서석으로 들어온 길이라고도 했다. 마당대기에서 관군과 동학군이 일전을 벌였는데, 그때 죽은 동학군들의 시체를 거두어 생곡휴게소 옆 골짜기에 매장했다고 한다.
‘모두부치’는 피비린내 나는 한국역사의 한 페이지를 간직한 곳이다. 지금 ‘모두부치’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다.
모두부치는 홍천강의 모산이다. 등산로도 없고 찾는 이도 별로 없지만 그만큼 원시의 숲과 깨끗한 생태계를 지닌 산이다.
‘모두부치’ 정상에서 생곡 방향으로 섰을 때, 오른쪽으로 뻗은 능선은 내면 자운으로 이어지고, 왼쪽으로 뻗은 능선은 흥정능선이다. 앞쪽으로 내리뻗은 능선은 세 갈래의 골짜기를 이루는데 가운데 골짜기가 마당대기로 이어지는 ‘미약골’이고, 오른쪽은 ‘가래나무골’이며, 왼쪽골짜기는 ‘장골’로 이어진다. ‘장골’에서 ‘마당대기’로 넘는 고개를 ‘불바라기’라 한다. 또 장골쪽에서 내려오다 능선을 넘으면 ‘구무소 마가리’이고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고분대월’이 나온다. 다시 왼쪽편 능선을 넘으면 ‘먼 골’이 나오는데 그 골은 아주 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피리골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넘어 동굴에서 나오는 ‘할미자리 약수’를 받으러 가곤 했다고 한다. ‘불바라기’와 ‘할미자리’는 단군신화와 연관이 있는 지명이다. ‘불’은 ‘범’의 옛 말이고, ‘할미자리’는 ‘웅녀(熊女)’를 지칭한다.
복잡한 듯 하지만 56번 국도를 중심으로 보면 쉽게 정리된다. 생곡 삼생초등학교가 들어선 자리는 도찬동 혹은 새찬동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 일대를 대찬동이라고 했다 하는데 검산으로 생곡으로 군두리로 나뉘면서 도찬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도찬동은 한 풍수가가 명당자리가 있을 것 같아 찾아 헤맸으나 명당자리가 없어 혀를 차고 돌아갔다 하여 붙여진 마을이라고 한다. 바로 삼생초교를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피리골’이다. ‘피리골’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저수지를 지나 따라 올라가면 ‘상비’와 배나무골로 갈라지고, ‘상비’를 따라 올라가면 ‘먼 골’로 이어진다. ‘먼골 마가리’에 ‘할미자리 약수‘가 있다.
다시 56번 국도를 따라 내면 방향으로 올라오면 ‘삼덕원’ 입구가 보이는데, 이곳이 판관대다. 판관이 나왔다고 한다. 판관대 앞쪽에는 뾰족한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표봉이라고 한다. 정상에는 500년 쯤 되는 노송이 있었다고 하고, 판관이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바둑을 즐기며 놀았다고 한다. 지금은 노송도 정자도 없다. 다만 그가 편안히 앉아 즐기던 자리가 바위에 남아있다고 한다.
표봉 아래로 치마바위를 널어놓은 듯 한 바위가 있다. 그 아래로 물이 흐른다. 치마바위 중간쯤에는 부엉이 굴이 있어 사람들은 부엉이가 사냥한 먹이를 주워다 먹기도 했다고 한다. 판관이 나왔다는 집터는 국도 오른편에 있는데, 세월이 무상하게도 폐가로 남아있다.
삼덕원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의 입구는 ‘곡죽동’이다. 옛날에는 호랑이가 나와 사람을 물고가 하룻밤 자고나면 빈집이 생겼다고 하여 ‘빈지울’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곡죽동에는 실제 대나무는 없다. 산비탈에 자라는 것은 산죽인데 피리를 만들지 못하고 조리를 엮는데 많이 사용한다. 그러면 죽(竹)은 어디서 유래 하였을까? 나는 피리골과 연간지어 보았다. 피리를 만들려면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피리골 사람들은 곡죽동으로 가서 피리 대를 꺾어왔다. 그때 꺾은 것은 대나무가 아니라 구리당(백지(白芷)·대활(大活)·흥안백지·독활·구리대·굼배지라고도 한다)인듯 하다. 지금도 골짜기에는 한길씩 자란 구릿대가 많이 서 있었다. 옛날에는 구릿대 대를 잘라서 퉁소며 피리를 많이 만들었으며, 최근에는 전통악기 체험으로 만들기도 한다. 더 들어가면 고분대월이라 부른다. 고분대월을 따라 올라가면 물줄기가 갈라진다. 왼쪽은 양지말이다. 지금은 외지인들이 들어와 지은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다. 골짜기입구는 입산금지 안내판이 서있다. 그 골짜기를 쭉 따라 오르면 ‘구무소마가리’로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끝까지 올라가면 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삼덕원이 나온다. 산비탈을 일구어 채소도 심고 감자도 심고 있었다.
다시 국도를 따라 내면방향으로 올라가면 삼광레미콘 서석공장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기전 오른쪽으로 옛 ‘서광분교’(지금은 폐교되었다)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이 골짜기는 장골이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장곡현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장골을 따라 끝까지 가면 ‘모두부치’로 오르고, ‘불바라기’ 재를 넘으면 마당대기로 이어진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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