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비 내리고 아침에 햇살이 들었다. 산마다 골마다 안개를 풀어 올렸다. 춘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은 얼음을 풀어내는 듯 했다. ‘미약골’을 향하여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44번 국도와 56번 국도가 교차되는 구성포 신내 사거리에서 오른쪽 56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농사준비로 바쁘다. 논을 갈고 비닐을 걷어내고 허접쓰레기를 태우는 연기가 박무처럼 낮게 퍼진다. 성급한 강태공은 낚싯대를 걸쳐 놓고 돗자리에 누워있다. 무슨 고기가 낚이냐고 물었더니 마자나 눈치, 꺽지가 물릴까하여 나왔다고 했다. 이미 그들은 봄이라는 큰 물고기를 낚아 올린 것 같았다.
‘미약골’을 가려면 어디서든 서석을 지나야 한다. 또 고개 하나는 꼭 넘어야한다. 동면 쪽에선 물골을 지나 ‘불목재’를 넘어 어론으로, 화촌면 쪽에선 장평을 지나 ‘솔치’(지금은 터널이 뚫렸다)를 넘어 역시 어론으로, 내촌 쪽에선 ‘진고개’나 ‘황새재’를 넘어 수하리로, 인제 상남에선 ‘행치령’을 넘어 수하리 절골로, 횡성에선 ‘원넘이재’를 넘어 청량으로, 내면에선 율전에서 시작되는 내리막 하뱃재를 미끌어지듯 내려와야 한다.
‘솔치’를 넘기로 했다. ‘솔치’를 넘으니 어론이다. 어론 초등학교(지금은 폐교됐다) 앞에서 ‘불목재’를 넘어 황경골 물줄기를 만나 이어지는 444 지방도와 만난다. 황경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제법 실하다. 다리를 건너고 주유소 지나 활처럼 굽은 도로 오른편에 솔무정이 보였다. 솔무정이 사이로 성황당이 서있다. 금줄이 쳐진걸 보니 제를 올린 지 오래지 않은 것 같다.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서석 장터로 들어섰다. 그러나 내 눈길을 끈 것은 내면 쪽 하늘에 닿은 눈 덮인 산의 정상이었다. 저 산 아래 꼭 ‘미약골’이 있을 것 같았다. 면사무소로 들어갔다. 민원실에 들러 ‘미약골’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었다.
- 왜 미약골인가?
- 미약골은 한자인가 우리말인가?
한자를 안다면 미약골의 지형이나 산세를 어렴풋이 알 듯했다. 그러나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는 답만 듣고 돌아서자 미안한듯 따라 나왔다. 이왕 하나만 더 물어보자. 면사무소 앞에서 내면 쪽 산이 팔부능선위로 눈이 하얗게 덮여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을 여쭸다. 역시 대답은 같다. 공무원들의 한결 같은 모범답안 같은 문구-알아보고 연락 주겠다.
괜한 짓을 한 것이다.
시원( 始原)을 찾아가는 일은 두발로 몸으로 가야 한다. 시원은 늘 열려 있으되, 몸으로, 땀으로 찾는 자에게만 길을 열어 준다 하지 않는가.
무작정 생곡으로 들어섰다. 서석 특산품 옥수수 찐빵을 쪄내던 자리엔 옥수수 막국수 현수막이 걸려있고 삼생초등학교 앞에는 두 개의 신호등이 서있다. 길이 확포장 되었다.
‘미약골’은 생곡에 있다. 생곡에는 골이 많다. 생곡이란 이름은 피리처럼 생긴 지형에서 유래한다. 정작 피리골은 생곡 저수지가 있는 골이고, 미약골 대월, 판관을 합쳐 생곡이라 한다. 나는 생곡의 옛 지명을 찾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먼저 오래 전에 이장을 했다는 강문백 노인을 찾았다. 몇 년 전에 검산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검산으로 갔다. 보건소 앞 담배 가게에서 물었더니 바로 건너편 집이라 했다. 문을 두드렸다. 외출하시려는지 막 일어서시는 참이었다. 백발의 동안(童顔)이셨다. 그러나 세월의 병이 깊은 것을 감추지 못했다. 걸음걸이가 시원해 보이지 않았다. 약속이 있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다음에 찾아뵙기로 하고, 생곡 휴게소를 지났다.
여기부터 ‘미약골’인가? 아니다. ‘대월(大月)’이다. 큰 달이 뜨는 마을이다. 산은 높고 골은 깊다. 산마루 하늘가엔 참나무가 어깨를 견주고 있다.
대월은 다시 상대월, 하대월로 나누어 부른다. 분교가 있었던 장골 입구는 하대월, 큰느정이, 작은 느정이, 장대골을 합쳐 상대월 이라고 한다. 대월을 지나자 상대월 쉼터가 나왔다. 쉼터에는 쉬어가는 사람도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문은 잠겨 있다. 건너편을 보니 미약골 휴양소가 보였다. 사람이 반가웠지만 외지에서 흘러든 터라 ‘맑은 공기와 바람소리가 좋다’라는 말만 광고처럼 되풀이 했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다리가 나왔다. 매봉산에서 시작하는 물줄기를 건너는 ‘여름나무골’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니 오른편으로 이정표와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이정표는 양양, 창촌을 가리키고 있고 그 앞에 홍천강 발원지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미약골 입구다.
대여섯 대 정도 차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비로소 미약골로 들어선다.
안내표지판에는 홍천 9경중 미약골과 홍천팔경의 사진이 낯선 나그네를 반긴다. 그러나 차단막이 내려져 있다. 자연 휴식년제로 입산통제 한다는 안내판이 줄줄이 서있다.
홍천군은 자연 휴식년제로 지정하여 미약골은 2009년 5월말까지 출입을 금하고 있다. 자연휴식년제는 수질보전과 탐방객들의 출입으로 산림훼손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실시되는 제도다. 찾는 사람이 없어 한산했다. 그때 차한대가 들어서더니 두 사람이 내렸다. 군에서 나온 직원이라고 했다. 뒤따라 차단막을 돌아 들어갔다. 호젓한 산책로 같은 오솔길에 낙엽이 두껍게 쌓여있다. 산비탈에는 산죽이 푸르다. 산책로는 광장으로 이어지고, 중간 중간 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게 돌계단이 나있다. 개물푸레나무와 신나무 참나무 박달나무가 돌길과 잘 어울리는 숲속의 공원 같았다. 눈길을 끈 것은 움막 같이 쌓은 둥근 돌담이다. 화전민이 살았다는데 그들이 살던 터는 아닐까? 자연 화전민들과 연관 지을 수밖에.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숯 굽던 터’였다고 한다.
광장에는 화장실과 미약골에 대한 안내판, 대리석에 새긴 ‘홍천강 발원지 미약골’이라는 자연석 돌기둥이 서 있고, 뒷면에는 ‘기기묘묘 바위가 아름다운 미약골/선녀가 내려와 목욕하고/신선도 노닐던 암석폭포/울창한 원시림은 자연생태계의 보고이네/콸콸 흐르는 용천수/400리 홍천강의 시작이네/ 2007년 11. 10./ 홍천군수 노승철’이라고 새겨져 있다.
‘미약골’은 여기부터 시작이다. 광장을 지나 트래킹 하듯 발원지를 찾아 올랐다. 그러나 ‘자연휴식년제 출입금지’라는 글자판이 단단히 막아놓은 철망에 걸려있었다. 들어가야 하나 돌아서야하나 망설이다가 군청에서 나온 직원에게 취재목적과 마당대기 지나 진펄(늪)까지 갔다 올 계획이라며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개구멍처럼 뚫린 철망을 넘어 들어섰다. 그들은 폭포수골까지 다녀올 생각이라며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숲의 터널이다. 물푸레나무가지가 척하니 신나무 어깨에 걸친다. 신나무 가지가 느릅나무 가슴을 파고든다. 붉은 줄기의 층층나무가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수릉수릉 돌돌돌 덜덜덜 흐르는 물소리는 계곡의 반석을 붉은 갈색으로 물들이며 흘러내린다. 등산로의 흔적도 없고 토끼길 같은 길의 흔적도 끊겼다 이어진다.
이제부턴 내가 가는 길이 곧 길이다. ‘홍천강 발원지’ 돌기둥에서 출발한지 사십분 정도 올랐다. 자그마한 골짜기가 나왔다. 이 골짜기가 폭포수 골인가? 모르겠다. 일단 메모지에 적고. 골짜기로 올라가 보니 폭포수는 없다. 돌 틈새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만 골짜기를 울린다. 다시 내려와 큰 물줄기를 따라 올랐다. 등허리로 땀이 흘러내렸다. 고목이 쓰러져 길도 막았다. 잠시 쉬어가자. 한 숨 돌리자. 땀으로 젖은 등줄기가 서늘하다. 다시 벗었던 옷을 걸치고 일어서려는데 건너 산 능선 한가운데 우뚝 선 바위가 나타났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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