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82]

절구시를 쓰면서 절구를 붙였다. 시제 붙이기가 어색했던 모양이다. 아니다. 시를 먼저 써놓고 ‘청련靑蓮’의 ‘기백氣白’을 담은 ‘후백後白’인양 바쁜 걸음을 내밀치고 출근하기에 바빴던 모양이다. <그랬었다면 퇴근 후에만 한 번 더 읽고 퇴고라도 하시면서 다듬은 다음 세제를 생각해 보시지 않고>라는 한 마디쯤을 보내면서. 가랑비가 주룩주룩 내려 돌아갈 길을 잃었는데, 나귀 타고 가는 십 리 길에 바람이 분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絶句(절구) / 청련 이후백
가랑비 내리고 돌아갈 길 잃어서 
나귀 타고 가는 길 바람이 이는데
들매화 피어 있어서 그만 넋을 잃었네. 
細雨迷歸路  騎驢十里風
세우미귀로   기려십리풍
野梅隨處發  魂斷暗香中
야매수처발   혼단암향중

은은한 향기 속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네(絶句)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1520∼1578)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가랑비가 주룩주룩 내려 돌아갈 길을 잃었는데 / 나귀 타고 가는 십 리 길에 바람이 부는구나 // 가는 곳 마다 들매화가 늘어지게 피어 있는데 / 은은한 향기 속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절구 한 수를 지으면서]로 번역된다. 시제를 [절구]라고 붙였다면 ‘도중즉사途中卽事’ 혹은 ‘즉사卽事’로 보고자 하는 뜻도 결코 무리는 아니겠다. 기승전결 절구형식으로 시를 쓰면서도 굳이 [절구]라 했기 때문이다. 시적인 흐름은 길 가는 도중에 자연의 풍광에 취하면서 시심의 흥취를 발휘하고 있다.

시인은 가랑비를 맞고 나귀를 타고 가는 도중에 했던 일과 보았던 일에 대한 옹알거리는 시심덩이를 만졌다. 가랑비가 포근하게 내려서 돌아갈 길을 잃었다고 하면서 나귀를 타고 가는 십 리 길에 바람이 불었다고 했다. 전경의 시상은 평범하지만 후정으로 이어지면서 시인의 깊은 심회를 읊으려는 속셈은 알게 되지만 결구에서 촌철살인寸鐵殺人과 같은 반전을 시도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화자는 길가에 피어 있는 자연산 들매화를 보면서 그 향기에 푹 취했음을 반전反轉의 자리에 놓고 있다. 가는 곳 마다 들매화가 늘어지게 피어 있었는데, 은은한 향기 속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고 했다. 기대했던 커다란 반전은 보이지 않았지만 들매화에 흠뻑 취한 시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돌아갈 길 잃었는데 십 리 길에 바람까지, 들매화 늘어졌는데 그만 넋을 잃었다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1520~1578)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71년 문신정시에 장원하여 가자가 되었고 1574년 형조판서에 특진되었던 초고속 증진 케이스다. 이조판서·양관제학을 지내고, 1578년 호조판서로 재직 중 졸하였다 한다.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한자와 어구】
細雨: 가랑비 迷: 잃다. 희미하다. 歸路: 돌아갈 길. 騎驢: 말을 타다. 十里風: 십 리 길. // 野梅: 들매화 隨處: 가는 곳. 따르는 곳마다. 發: 피었다. 만발하다. 魂斷: 넋이 끊어지다. 暗香: 암향. 은은하게 풍기는 매화 향기. 中: 가운데 또는 길을 가는 도중에.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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