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80]

정이 얼마나 깊고 높게 쌓였으면 정을 담아 임께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여심의 정情은 한恨과 함께 한번 심어놓으면 피부 속 깊은 곳에 담겨진단다. 그것을 한 통의 서찰과 함께 시정詩情으로 담아 놓으면 한 송이 꽃이 되고,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임의 한 방에 곱게 전해질 수 있으리라. 시인의 생각은 이렇게 미쳤을 것이다. 창망하게 바라보면서 사립문 닫지 못하고, 밤 깊으니 바람과 이슬에 옷 적신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寄情(기정) / 양사기 소실
창망히 바라보며 사립문 닫지 못해
깊은 밤 바람과 이슬 겉옷을 적시는데
양산관 꽃을 보면서 돌아오지 못하신지.
悵望長途不掩扉      夜深風露濕羅衣
창망장도불엄비      야심풍로습나의
楊山館裡花千樹      日日看花歸未歸
양산관리화천수      일일간화귀미귀

날마다 양산관 꽃들을 보면서 돌아오지 못하나요(寄情)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양사기 소실(楊士奇 小室: ?∼?)로 여류시인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창망하게 바라보면서 사립문 닫지 못하고 / 밤 깊으니 바람과 이슬에 옷 적시네 // 양산관 안 곱게 핀 천만 가지 꽃나무가 많은데 / 날마다 양산관 꽃들을 보면서 돌아오지 못하시나요]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정을 담아 붙임 / 양사기 낭군을 그리며]로 번역된다. 사대부 소실이 양사기라는 임을 그리는 절절한 한편의 연정시戀情詩다. 이 시를 여인네의 무기(?)인 질투심이 은근하게 배어나는 시상을 엿보게 된다. 아니다. 질투심은 여인네만 간직한 오롯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간직한 자기만의 무기일 것이다.

시인은 행여나 오늘밤에는 오시지 않는가 하는 초조한 마음으로 사립문을 닫지 못하고 기다리는 조선 여심을 그려가고 있다. 창망히 바라보면서 사립문도 닫지 못하고, 밤이 깊으니 바람과 이슬을 맞아 옷을 적셨다는 선경의 시상 뭉치를 그려냈다. 바람만 불어도 임이신가. 낙엽만 굴러도 임의 발자국인가를 생각한 여심, 그래서 뜨락에 서성이며 기다리다 보니 이슬에 옷이 젖었다는 심회를 만나게 된다.

화자의 후정은 임이 계시는 양산관의 천만 그루 꽃을 생각하며 그 꽃에 취하여 못 오시는가를 묻는다. 임은 양산관 안에 곱게 핀 천만 가지 꽃나무들인데, 날마다 그 꽃을 보며 돌아오시지 못 하신가 라고 했다. 천만 가지 꽃은 그 임이 근무하고 있는 양산관의 기녀들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리라.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창망히 사립문 닫고 밤이슬에 옷 적셔. 찬만 가지 꽃 보면서 돌아오지 못 하나요’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작가는 양사기 소실(楊士奇 小室: ?∼?)로 알려진 여류시인이다. 양사기(楊士奇: 1531~1586)의 아호는 죽재竹齋로,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로 종장을 맺는 태산가泰山歌를 지은 시인 봉래 양사언의 아우다.

【한자와 어구】
悵望: 창망하게 보다. 長途: 먼 길. 不掩扉: 사립문을 닫지 못하다. 夜深: 깊은 밤. 風露: 바람과 이슬. 濕: 젖다. 羅衣: 겉옷 // 楊山館: 양산관. 임의 근무처. 裡: 속, 안. 花千樹: 천만 그루 꽃. 日日: 날마다. 看花: 꽃을 보다. 歸未歸: 돌아오는가 돌아오지 못하는가. 상대에게 택일을 묻는 어투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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