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78]

조선조의 선비 중에 매화를 좋아했고, 매화에 관계된 시를 제일 많이 썼던 시인 한 분을 고르라면 퇴계退溪를 제일의 반열에 놓아야 될 것 같다. 매화는 봄의 전령으로 알려지면서 숱한 염문艶文을 뿌렸기 때문이다. 누구를 사랑해서 인가. 누구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것인가를 서슴없이 노출해 내는 고고함을 뽐냈다. 고서(古書)를 보면서 그 속에서 성현을 마주 대하고. 밝고 텅 빈 방안에 홀로 앉아 독서한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梅花詩(매화시) / 퇴계 이황
고서에서 성현을 방안에 홀로인데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마주하니
가야금 끊어진 줄에 탄식하지 말게나.
黃券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
황권중간대성현    허명일실좌초연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매창우견춘소식    막향요금탄절현

가야금의 줄이야 끊어짐일랑 탄식하지를 말게(梅花詩)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고서(古書)를 보면서 그 속에서 성현을 마주 대하고 / 밝고 텅 빈 방안에 홀로 앉아 독서하네 //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마주하게 되니 / 가야금의 줄이야 끊어짐일랑 탄식하지를 말게]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매화시를 쓰면서]로 번역된다. 시인 퇴계에겐 소실로 '두향杜香'이라는 기녀가 있었다.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후 만난 여인인데, 임기가 다 되어 떠난 뒤에도 그를 향한 절개를 지켰다. 1571년 퇴계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충주 강선대에서 충주호로 몸을 던져 투신했던 일화가 전한다. 이 때 쓴 시상이 ‘매화시’였다 한다.

시인은 성리학의 태두로 알려지지만 홀로 방안에 앉아 깊은 사색은 물론 세태도 되돌아 봤을 것이다. 고서古書를 보면서 그 속에서 성현을 마주하면서도 밝고 텅 빈 방안에 홀로 앉아 있다고 했다. 학자답고 시인다운 태도로 큰 사상가다운 태도의 시상이다.

화자는 혼자 있을 땐 오직 인간이고 싶어 매화를 기다리면서, 아니면 두향을 맡아가면서 가야금에 관심을 가졌으리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마주하니, 가야금 줄이야 끊어짐을 탄식하지 말라는 시상을 매만지고 있다. 퇴계가 떠나고 두향도 떠난 뒤 퇴계의 후손들이 두향의 절개를 높이 생각하여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시제를 드린다 한다. 두향은 매향으로 태어났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고서 보며 성현 대해 방안 홀로 독서하네. 봄소식을 마주하니 가야금 줄 탄식 말게’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1545년(인종 1) 전한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율곡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한자와 어구】
黃券: 고서. 中間: 중간에. 對聖賢: 성현을 대하다. 虛明: 허명하다. 一室: 한 방에서 坐超然: 초연하게 앉다. // 梅窓: 매창. 又見: 또 보다. 春消息: 봄소식. 莫向: 향하지 말라(금지사). 瑤琴: 가야금을 타다(떨리다). 嘆絶絃: 줄이 끊어짐을 탄식하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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