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4-76】

한가하게 살면서 새로운 사실을 경험하고 산다.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꿈의 세계를 연출하면서 산다. 진실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 지난날을 되돌아보든지, 앞으로의 나를 설계해 보면서 산다. 그리고 그 때 그 때의 글과 생각을 써놓으면 막힘없이 써놓으면 즉사卽事가 되고 다듬어 놓으면 한 편의 작품이 된다. 순무는 이삭을 맺고 보리는 싹이 트고, 범나비는 날다가 가지 꽃밭에 들어간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閒居卽事(한거즉사) / 이체
순무는 이삭 맺고 보리는 싹이 트고
범나비 날아가다 가지꽃밭 들어가네
묵정밭 햇살 비추어 봄 풍경 전가이니.
蕪菁結穗麥抽芽 粉蝶飛穿茄子花
무청결수맥추아  분접비천가자화
日照疏籬荒圃靜 滿園春事似田家
일조소리황포정   만원춘사사전가

성근 울타리에 햇살을 비추어 묵정밭이 고요하니(閒居卽事)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이체(李棣:1497~1562)로 태산수泰山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순무는 이삭을 맺고 보리는 싹이 트고 / 범나비는 날다가 가지 꽃밭에 들어가는구나 // 성근 울타리에 햇살을 비추어 묵정밭은 고요하니 / 뜰 가득한 봄 풍경일랑 마치 전가(田家)와도 같다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한가하게 살면서 읊은 즉흥시]로 번역된다. 조선의 문화는 조용하고 한가했다. 국민적인 생산력 증대도 필요 없었고, 민족중흥과 같은 슬로건도 필요 없었다. 전제군주정치하에 충성과 복종만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오늘도 편안하게 무사안녕을 기원했고, 유유자적한 생활이 그 전부였다. 농본주의 사회에서 자연과 벗하면서 사는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시인도 그랬던 모양이다. 한가하게 살면서 어떤 생각이 있어 즉흥적으로 읊었다. 자연을 보면서 읊은 시상들이다. 순무는 이삭을 맺고 보리는 싹은 터나오고, 범나비들은 날다가 가지 꽃밭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저 농촌의 한가한 풍경과 세월을 낚고 있는 한 노인장인 태산수가 읊는 시 한 수를 듣는 듯하다.

화자는 이렇게 한가하고 좋은 때에 울타리의 묵정밭을 보고, 뜰 가득한 봄 풍경이 취한 모습을 한 줌 시상이 덧칠해 보인다. 성근 울타리에 햇살 비추어 묵정밭이 고요하니, 뜰 가득한 봄 풍경은 전가(田家)와 같다고 했다. 두 어깨를 머리 위로 ‘쭈-욱’ 올리면서 봄기지개를 켜는 느낌이다. 한적한 봄 풍경과 따스함이 스민 전가를 같은 선상이 놓았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순무 이삭 보리 트고 범나비는 꽃밭 들고, 햇살 받은 묵정밭엔 봄 풍경은 전가 같고’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이체(李棣:1497~1562)는 ‘태산수泰山守’라는 아호인 듯한 다른 이름과 생몰에 대한 일부의 정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행적에 대한 자세함이 분명하지는 않는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蕪菁: 순무, 穗: 이삭. 麥抽芽: 보리가 싹이 트다. 粉: 분분하다. 蝶飛穿: 나비가 하늘을 날다. 茄子花: 가지 꽃밭에 // 日照: 해가 비추다. 疏籬: 성근 울타리. 荒圃靜: 묵정밭이 고요하다. 滿園: 정원이 가득하다. 春事: 봄의 일. 곧 봄 풍경을 뜻함. 似田家: 전가와 같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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