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73]

가정일 돌아가는 것에 관심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가장도 있다. 시인은 후자의 경우에 속했던 모양이다. 너무 자상한 남정네를 만나는 것 같아 불량 남편인 평자는 부끄러움 금치 못하겠다. 자식들이 말 배우고 노비들이 양식이 없다 투덜거리는 모습이며 뜨락에 황량하게 시들어 간 가을 풀까지 세심한 일까지 다 떠올린 시심을 본다. 그대여! 야위어 갈 당신의 얼굴이 삼삼하게 보고 싶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懷妻(회처) / 복재 기준
슬하의 아이들은 말을 곧잘 배우겠고
양식 없다 투덜대는 부엌의 늙은 종들
보고파 너무 보고파요 야위어 간 그대 얼굴.
膝下孩兒新學語     竈門奴婢舊懸瓢
슬하해아신학어      조문노비구현표
林苑寥落生秋草    想見容華日日凋
임원요락생추초      상견용화일일조

야위어만 갈 그대 얼굴이 삼삼하게 보고파라(懷妻)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복재(服齋) 기준(奇遵:1492~1521)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슬하의 아이들은 이제 말을 곧잘 배워 가겠고 / 부엌 안의 늙은 종들은 지금 양식이 없다고 하겠지요 // 뜨락에는 황량하게 가을풀이 돋아났겠는데 / 그대여! 야위어 갈 당신의 얼굴이 삼삼하게 보고파라]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아내에게 회포를 담아내다]로 번역된다. 시인은 먼 외지로 나가 벼슬살이를 했던 모양이다. 요즈음 정부부처 직원으로 치면 식솔들은 서울에 두고 혼자서 세종시로 가 근무하는 격이 아니었을까 하는 처지를 생각하면 선뜻 이해되리라 생각된다. 교통이나 통신 수단이 없었던 선현들 시대를 대비한다면 시제나 시상이 주는 시적 이미지는 훨씬 가깝게 닿을 것이니.

시인은 슬하 자식들이 말을 배우고, 부엌 종들이 양식 없어 안달 부리는 장면의 그림 한 폭을 그려내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내 떠나온 이후로 슬하의 아이들은 말을 곧 배워가겠고, 부엌지기 늙은 종은 양식이 없다고 투덜대는 한 시심을 일구어 냈다.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림으로는 훤하게 그려지는 시적인 선경先景이다.

화자는 너무 자상하여 뜨락의 풀과 도톰했던 아내의 얼굴이 야위어 가는 모습도 상상도想像圖에 색칠해 내고 있다. 뜨락은 황량하게 가을풀이 수북하게 돋았겠고, 고왔던 얼굴은 지금쯤 야위어 갈 그대 얼굴이 삼삼하게 보고 싶다는 시상이다. 몸은 동東에, 마음은 서西에 있음이 훤하게 보이는 시인의 초조함이리라.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슬하 자식 말배우고 늙은 종들 양식 없다, 뜨락 황량 가을풀만 야위어 갈 그대 얼굴’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복재(服齋) 기준(奇遵:1492~1521)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했던 인물이다. 이후 사관을 거쳐 1516년 저작으로 천문예습관을 겸하였다 하고 홍문관박사, 검토관, 수찬, 시강관 등을 거쳤던 인물로 알려진다.

【한자와 어구】
膝下: 슬하. 孩兒: 어린 자식. 新學語: 새롭게 말을 배우다. 竈門: 부엌문. 奴婢: 종. 노비. 舊懸瓢: 헌 표주박에 매달리다. 양식이 없다 하다. // 林苑: 뜰에는. 寥落: 쓸쓸하게 떨어지다. 生: 자라다. 秋草: 가을 풀. 想見: 그대를 상상해 보다. 容華: 고왔던 얼굴. 日日: 날마다. 매일. 凋: 시들다. 야위어가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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