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72]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사람을 본다. 5년마다 갈리는 대통령의 향배에 몸을 맡기는 철새 떼들을 본다. 회재 시인은 지하에서 비웃고 있을 것이다. 지조 없이 들 왜 그러느냐는 엄한 꾸지람이 들리는 듯하다. ‘오호 통재라! 나약한 자들이여!’란 질타까지 들린다. 외길을 걷다가 한 줌의 흙이 될지언정 ‘권세와 돈’에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 한마디를 해바라기에서 찾는다. 다만 온통 붉은 마음을 해 향하여서 기울어본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秋葵(추규) / 회재 이언적
가을 하늘 열려도 꽃빛은 변치 않고
오솔길 따라서 봄의 번성 다툰다네
감상할 사람 없어도 변함없는 그 단심.
開到淸秋不改英      肯隨蹊逕鬪春榮
개도청추불개영      긍수혜경투춘영
山庭寂寞無人賞      只把丹心向日傾
산정적막무인상      지파단심향일경

산 뜨락 적막하여 감상할 사람이 아무도 없네(秋葵)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맑은 가을 하늘 열려도 꽃빛은 변하지 않고 / 기꺼이 오솔길 따라서 봄의 번성과 다투어보네 // 산 뜨락 적막하여 감상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도 / 다만 온통 붉은 마음을 해를 향하여 기울어본다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가을 해바라기]로 번역된다. 시인은 동방 5현의 한 사람으로 지정되어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었던 사람이며, 따라서 명종의 묘소에도 함께 배향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시인은 이렇듯 강직하게 살아온 사람인만큼 시적인 착상이나 흐름은 이미 시선詩仙의 경지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가을 하늘과 봄의 번성이란 대비법을 구사하더니만,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지 못한 운명선까지 그어놓기에 분주한 모습이다. 그래서 시인은 맑은 가을 하늘이 열려도 꽃빛은 변하지 않고, 기꺼이 오솔길 따라서 봄의 번성과 다투어본다고 했다. 시인의 불굴성이나 진실성을 엿보이는 작품의 면면이 살아 꿈틀거린다.

화자는 해바라기 특성이란 봇짐을 한아름 안고 참신성을 보인데 주저하지 않는다. 외로운 산 뜨락이 적막하고 비록 감상할 사람은 없어도, 온통 붉은 마음 간직하고 해를 향하여 기울어본다고 했다. 초심을 잃지 말고 초점을 향하는 독실한 [시적詩的인 자아自我의 한 길]을 열어 보인 반면,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모범적인 가르침을 해바라기 특성으로 제시한 수작으로 보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변치 않는 가을 하늘 봄의 번성 다투면서, 감상할 사람 없어도 단심만은 변치 않고’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이황 이후의 영남 사림들도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이황]으로 연결하여 김종직으로 학문적 연원을 삼기도 했던 인물이다. 일강십목으로 된 상소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던 사람으로 알려진다.

【한자와 어구】
開到: 열리어 이르다. 淸秋: 맑은 가을(하늘). 不改英: 꽃빛을 바꾸지 않다. 肯: 기꺼이. 隨: 따르다. 蹊逕: 오솔길. 鬪: 다투다. 春榮: 봄의 번성. // 山庭: 산 뜨락. 寂寞: 고요하고 적막하다. 無人賞: 감상할 사람 없다. 只: 다만. 把: 잡다. 丹心: 단성. 붉은 마음. 向: 향하다. 日傾: 기울어 가는 해.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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