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지금부터 약 70여 년 전 우리나라의 국민총소득은 약 60여 달러였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6만여 원에 불과한 초빈국이었다. 하긴 물가상승률(부동산과 생필품)에 의하면 부분에 따라서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차이도 있긴 하다. 예를 들면 토지(산 전답)의 경우 현재 10만 원이 넘는 임야가 당시 3~4원 했고 농지(갈마곡리 여중근처)가 100원씩 했다. 물론 제방도 없고 큰 장마가 오면 침수가 되긴 했지만 가격은 그러했다. 현재는 어떤가. 평당 3~4백여만 원이니 약 만 배가 오른 셈이다.

1962년 홍천군 인구가 12만 7천여 명에 가구수는 2만 1천 호(출처 홍천교육청 발행 향토지 27쪽 인용)였다. 일 년 출생인구가 6,973명 사망이 1,555명 혼인건수는 1,072건 이혼은 39건이었다. 라디오를 가진 집이 홍천읍이 1,258대고 군내 전체로는 4,124대였다. 총 앰프가구 수 4,362호가 방송을 들었다. 대체적으로 집집마다 라디오는 다 한 대씩 있었다. 100가구에 5집만 없었다. 

라디오는 일제나 미제가 대부분이었고 국산으로는 금성사(지금의 LG) 제품이 조립돼서 팔렸다. 라디오가 대중화되기 전 50년대 중반부터 60년까지 라디오가 없는 집은 유선방송이라고 해서 매 집당 스피커를 설치해주고 유선방송사에서 별도의 유선을 설치해 엠프방송을 듣게 했다. 그 당시 유명했던 라디오 프로는 당연히 일일연속극이었다. 연예인 중에서도 성우들이 인기가 대단해서 선호도 1위였다. 남자성우는 민구 김성원 오창환 여자성우는 고은정이 유명했다. 

유선방송에 이어 국산 라디오가 급속도로 보급되고 따라서 아나운서들의 인기도 덩달아 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나운서는 인기직업의 하나였다. 당시는 KBS중앙방송과 민간방송으로 MBC문화방송 두 개 뿐이었다. KBS에는 여자아나운서로 강영숙이 최고 인기였고 MBC에서는 김인숙이 인기였다. 남자아나운서는 임택근 이광재 강찬성 강익수 박종세 전영우 등이 유명했다. 특히 박종세는 5.16 군사정변의 첫 보도를 했다. 

이들 후 차세대 아나운서로 이규항 이계진 김동건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은퇴하고 현역으로 김동건만 지금도 프리랜서로 KBS의 가요무대를 진행하고 있다. 이계진은 원주 출신 명사회자로 유명했고 중년에 방송을 떠나 정치에 입문 국회의원을 했으며 그 후 강원도지사에 도전했다 실패한 후 원주 소초면에 낙향해 살고 있다. 평창 출신 엄기영 앵커도 MBC에 수십 년 있다가 강원도지사에 출마했다 낙선 후 방송을 접었다. 특히 강영숙 여자아나운서는 어린이프로그램 “누가누가 잘하나”를 수년간 진행했고 임택근은 “스무고개” 프로를 이광재는 각종 스포츠 중계로 유명했다. 강찬성은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시작해 KBS국영방송에서 활약했고 그의 딸이 현재 외무부장관으로 활약하고 있다.

진공관식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자 유선방송 앰프(스피커)가 사라지고 이 유선방송은 후에 TV유선으로 사업을 바꿔 지상파방송 최초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라디오 발달이 전축으로 이어지고 진공관 라디오가 없어지면서 트랜지스터가 발전했다. 작은 크기의 라디오가 생산됐으며 값도 내려가기 시작해서 웬만한 집에는 방마다 라디오가 있었다. 가전제품이 라디오에서 TV로 바뀌고 컴퓨터가 나오기 한참 전인 60년대는 살림살이 중 비중이 큰 것이 라디오 흑백TV 재봉틀 전화기 시계 자전거 등이었다. 생활용품이나 가재도구의 발달은 곧 인류의 문화생활과 직결돼있다. 

그 당시에는 한 가족이 보통 6~7명이었다. 많은 식구는 열이 넘었고 자녀들만 7~8명을 둔 집도 허다했다. 외지에 분가해서 사는 자녀들 빼고는 부모들과 아이들이 오순도순 다 같이 살았다. 가정이 넉넉지 못한 집들은 한 방에서 온 가족이 같이 자고 먹고 했다. 지금 같으면 감히 생각도 못할 일들이다. 그래도 웃음소리 나고 살맛이 나는 정겹던 한때 우리들 삶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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