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69]

천기天機는 다음 네 가지가 보인다. ①매우 중대한 기밀 ②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이나 성질 ③만물을 주관하는 하늘이나 대자연의 비밀 또는 신비 ④임금이 비밀리에 내리는 명령이나 나라의 기밀 등이다. 여기에서는 세 번째의 뜻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겠다. 철학자이기에 철학의 의미에 맞도록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다. 모든 사물은 하나가 둘을 타고 있고, 사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天機(천기) / 화담 서경덕
하나가 둘 타고 서로가 의지하며
현묘하게 기틀을 꿰뚫어서 있는데
빈 방에 앉아 있어도 새로운 빛 머금네.
看來一乘兩   物物賴相依
간래일승량    물물뢰상의
透得玄機處   虛實坐生輝
투득현기처    허실좌생휘

비록 빈 방에 앉아 있어도 새로운 빛을 머금는구나(天機)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체 6구다. 작가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모든 사물은) 하나가 둘을 타고 있으면서 / 사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있구나 // (모두가) 현묘한 기틀을 서로 꿰뚫고 있나니 / 비록 빈 방에 앉아 있어도 새로운 빛을 머금는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하늘의 기밀 / 조화(造化)의 신비]로 번역된다. 철학자이기에 철학이란 근원을 밝히려는 시상을 만난다. 맷돌의 원리에서 천기를 발견하려는 시심이 있는가 하면, 이를 바로 원용한 시심의 직설적인 표현도 철학과 문학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보여준다. 이 시문 앞에 놓인 연구聯句 2구는 [바람이 그치자 달이 밝게 비추고(風餘月揚明) / 비가 온 뒤에 풀들은 향기롭구나(雨後草芳菲)]를 선경先景으로 꾸미고 있다.

시인은 사물이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타고(乘) 있듯이, 서로 의지(依)해 있듯이’ 얽혀 있다는 시상을 매만지고 있다. 모든 사물은 하나가 둘을 타고, 사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해 있다고 했다. 하나와 둘 뿐이겠는가. 셋과 넷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얽히고설킨 관계가 천기라는 뜻일 게다. 

화자는 얽혀 있는 관계와 관계들이 현묘한 기틀을 꿰뚫고 있나니, 빈 방에 앉아 있어도 새로운 빛을 머금는다고 했다. 인간을 떠난 철학은 존재할 수 없다. 문학, 신학도 다 마찬가지다. 서로가 얽히는 가운데 학문이 발전되고 인간이 인간다워진다 기본적인 원리를 보이는 귀중한 예라고 하겠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하나가 둘을 타고서 사물 서로 의지했네. 현묘한 기틀 꿰뚫고 새로운 빛 머금구나’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복재(復齋) 서경덕(徐敬德:1489∼1546)으로 조선 중기의 대철학자다.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완성했다.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불렸던 인물이다. 1585년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한자와 어구】
看來: 오는 것을 보다. 一乘兩: 하나가 둘을 타다. 物物: 모든 물건들마다. 賴相依: 서로가 의지하다. // 透得: 꿰뚫고 있다. 玄機處: 현묘한 곳이다. 虛實: 허실. 坐生輝: 앉아서 혼미하게 되다. 혼미함을 낳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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