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67]

깊은 생각 속에 시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순간적인 스침이나 즉흥적으로 쓴 글을 우리들은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 가만히 있는 자연적인 객관적 상관물도 걸으면서 보면 또 새롭게 보이고, 움직이는 물체도 정지해서 보는 것보다 움직이면서 보면 또 달리 보이는 수가 있다. 이동의 변화로 인한 현상으로 그 느낌이 새롭게 보인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황야에 임하고 보니, 굶주린 까마귀가 저무는 마을로 내리고 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卽事(즉사) / 충암 김정
서쪽으로 지는 해가 황야에 임하고
굶주린 까마귀가  마을에 내리는데
숲에는 오두막집엔 사립문 닫고 있네.
落日臨荒野  寒鴉下晩村
낙일림황야    한아하만촌
空林煙火冷  白屋掩柴門
공림연화랭    백옥엄시문

빈숲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쓸쓸하기만 한데(卽事)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충암(沖菴) 김정(金淨:1486~1520)으로 조선 전기 문신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뉘엿뉘엿 지는 해가 황야에 임하고 보니 / 굶주린 까마귀가 저무는 마을로 내리고 있네 // 빈숲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쓸쓸하기만 한데 / 오두막집에서는 사립문을 닫고 있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즉흥적으로 지은 시]로 번역된다. 이 시의 주제는 ‘해질 무렵’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도중즉사途中卽事]란 시제도 많지만 즉사가 더 많은 것 같다. 시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시상은 다 달랐다. 이렇게 보면 시상은 골똘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일구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멀고 가까운 곳에서 보거나 응시하면서 시상을 떠올리는 그런 방식이었음을 알게 한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다. 시인은 황야를 누비는 해를 보면서 마을에 내리는 까마귀 내리는 광경을 시상의 얼개에 얽혔다. 지는 해가 저 멀리 지평인 황야에 임하는 모습 속에서 굶주린 까마귀가 저무는 마을로 내린다고 했다. 지는 해(日)와 굶주린 갈까마귀(鴉)를 대비하는 시상의 멋이다. 한시의 특징인 대구적對句的 형식을 보인 시상이다.

화자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에 사립문 닫는 오두막집을 연상하면서 시상의 문을 닫으려고 한다. 빈숲에는 연기가 쓸쓸하기만 한데, 오두막집에는 사립문을 닫고 있다고 했다. 대구적인 시심은 여기에서도 멈출 수는 없었다. 빈숲(空林) ·오두막집(白屋)과 연기(火) ·사립문(柴)까지도 대비해 보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너른 황야 임한 햇빛 까마귀는 마을 향해, 빈숲 연기 모락모락 사립문을 닫는구나’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1권 3부 外 참조] 충암(沖菴) 김정(金淨:1486~1520)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이다. 1515년 순창군수로 있을 때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것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복위해야 하며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 등을 추죄할 것을 상소했다가 보은에 유배되었다.

【한자와 어구】
落日: 해가 떨어지다. 臨荒野: 황야에 임하다. 寒鴉: 굶주린 까마귀, 또는 겨울 까마귀. 下晩村: 마을로 내려오다. // 空林: 빈 마을.  煙火: 인가에서 나는 연기, 여기서는 저녁연기. 冷: 차다 .쓸쓸하다. 白屋: 띳집 또는 가난한 집. 掩柴門: 사립문을 가리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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