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62]

봄이 되면 마음 상할 일도 많았던 모양이다. 작년에 피었던 꽃은 금년에도 곱게 꽃이 피지만, 이 내 인생살이는 팍팍하고 늙어가고 있으니 한탄할 일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봄이 되면 멀리 떠난 임이 오신다고 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어 속상할 일도 많았다. 봄이 되면 대학에 가야되는데 형편 때문에 가지 못해 속상하다. 차를 한 잔 마시자 졸림이 말끔히 가시었는데, 저 건너 집에서는 옥피리 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傷春(상춘) / 삼괴당 신종호
차를 한 잔 마시자 졸림은 가셨는데
저 건너 집에서는 옥피리 소리 들리고
꾀꼬리 떠나서 가니 붉은 비만 지는구나.
茶甌飮罷睡初醒    隔屋聞吹紫玉笙
다구음파수초성    격옥문취자옥생
燕子不來鶯又去    滿庭紅雨落無聲
연자불래앵우거    만정홍우락무성

뜨락 가득 붉은 비는 소리 없이 지는구나(傷春)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1456~1497)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차를 한 잔 마시자 졸림이 말끔히 가시었는데 / 저 건너 집에서는 옥피리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누나 // 제비는 아직도 오지를 않았는데 꾀꼬리만 떠나니 / 뜨락 가득 붉었던 비 소리 없이 지는구나] 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봄을 상심하다]로 번역된다. 봄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봄은 암만해도 기다리는 계절이다. 봄은 생명약동을 약속하는 그러한 계절이었다. 가을을 상심하는 상추傷秋를 별로 보지 못했다. 대체적으로 봄을 상심하는 상춘傷春이 많고 보면 좋은 계절, 기다려지는 계절이면서 성큼성큼 다가오지 못한 늦은 계절을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봄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은 느긋한 것 같으면서도 조급하고, 조급한 것 같으면서 옥피리 소리에 관심을 보인다. 차 한 잔 마시자 졸림은 가시었는데, 저 건너 집에서는 옥피리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동중정動中靜이라고했던가. 서둘러 맞이해야 할 봄을 느긋하게 기다리며 손을 별려 안아주어야 할 숙명과도 같은 상춘을 고민하는 모습도 본다.

화자는 이제 제비와 꾀꼬리 소리에 정신을 집중시키더니만, 만발했던 꽃을 시샘하는 빗소리를 대비해 보인다. 제비는 아직도 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꾀꼬리만 떠나니, 뜨락 가득 채웠던 붉은 꽃을 떨어뜨리는 비에 소리 없이 진다는 시상을 이끌어냈다. 기다리는 봄과 지는 꽃이란 역설적인 시상의 멋을 찾는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차 한 잔에 졸림 가셔 옥피리 소리 들리고, 제비 없이 떠난 꾀꼴 뜨락 가득 빗소리만’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1456~1497)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명나라에 다녀온 후 수찬, 교리를 지냈던 인물이다. 1486년 문과중시에 다시 장원이 되어 과거제도가 생긴 이래 세 번의 장원은 처음이라 하여 그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해에 예빈시부정으로 초배되기도 했다.

【한자와 어구】
茶甌: 차를 한 잔. 飮罷: 마시기를 끝내다. 睡初醒: 졸음이 가시다. 隔屋: 막힌 집. 聞吹: 부는 소리 들리다. 紫玉笙: 옥피리 생황. // 燕子: 제비. 不來: 오지 않다. 鶯又去: 꾀꼬리가 떠나다. 滿庭: 뜰에 가득하다. 紅雨: 붉었던 비. 落無聲: 소리 없이 떨어지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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