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1960년도부터 최근까지 홍천지역에서 사라진 건물이나 시설물 몇 가지를 짚어본다. 먼저 구 문화원 철거다. 두 번째는 천연연못을 메운 거다. 한곳이라도 남아있더라면 지금 얼마나 좋았을까. 세 번째는 무궁화거리 철거다. 시내 한복판에 무궁화가 심어진 소공원 거리가 있었다는 것은 전국 어디엘 가도 없다. 네 번째는 옹기가마다. 연봉리와 송정리 등에 있었다. 다섯 번째는 가내공업인 닥나무로 만드는 문창호지 공장이다. 한지를 만드는 가내공업으로 홍천에는 1950~60년대에는 거의 마을마다 있었다. 특히 남면지역과 서석 화촌면 등에 많았다. 농가에서는 닥나무를 밭둑이나 산자락 등에 심었다가 한지공장에 넘기고 그 대가를 한지로 받아 문창호지로 사용했다. 그러다 개량주택이 들어서고 창문이 유리 등으로 바뀌면서 한지 사용이 급격히 줄자 마을마다 있던 한지 소규모장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옹기공장도 마찬가지다.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스틸 등의 그릇이 대량으로 나오자 토기를 제작하던 옹기공장은 자연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연봉리의 옹기공장은 한때 가마가 세 개나 있는 큰 규모였으나 하나하나 줄더니 마지막 가마까지 폐쇄하고 결국 옹기 생산 자체를 중단했다. 옹기는 주로 항아리와 막대접 뚝배기 물동이 등이 생산됐다. 송정리에도 옹기공장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운영자들은 모두 카톨릭(성당) 교인들로 이뤄졌다. 200여 년 전 천주교 박해 때 시골로 내려와 생계수단으로 옹기를 구웠다.

구 홍천문화원은 1950년 6.25 한국전란 직후에 건축된 홍천 최초의 대형 공연장이며 회의장이었다(구 문화원에 대한 기고는 몇 차례 언급한바 있다). 홍천군 청년단원(단장 성낙신)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건축했다. 쌀은 한말 잡곡은 두 말 곡식으로 낼 형편이 안 되는 대원들은 인력을 지원했다. 물론 상당 부분은 성 단장이 부담을 했다. 당시 영서지역에서는 내로라하는 좋은 건물이었다. 전면은 2층으로 사무실과 영사실 등이 있고 1층은 역시 사무실과 공연장이 있었는데 1960년에 개보수를 하고 내부수리를 했으며 1970년대 증개축을 했다가 2010년경에 완전 철거되고 연봉리에 현 문화센터를 신축하고 이전했다. 

구 문화원이 어떤 자리인가. 1945년 광복 후 적산재산(일본인 소유의 부동산)을 대한청년단(애국청년단 단장 성낙신)이 접수해 민간인이 점유한 부분은 그들에게 소유권을 넘겨주고 그 외 건물은 철거했다. 이곳은 주로 먹거리와 주점 등 상가지대였다. 인근 북동쪽엔 미전거리가 있어 홍천의 노른자위 상가지대였다. 문화관을 지은 후 홍천의 실내행사는 모두 이곳에서 했다. 또 영화와 연극 예술 공연 등을 모두 이곳에서 했다. 60년 동안 수많은 애환이 깃든 역사적 건물이었다. 철거 이유는 지붕에 누수현상이 있고 건물이 낡았다는 이유로 철거했단다. 철거비용 2~3억 원이면 보수가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고택건물들이 누수 된다고 철거한다면 조선왕조 5백년사의 옛 건물들은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게다. 아무튼 아쉬운 일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유료공영주차장을 신설해 사용하고 있다.

또 없어진 것 중 하나가 도로의 은행나무 가로수다. 수십 년 된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모두 베어졌다. 물론 여기에는 주변 상가들의 민원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아쉽다. 무더운 여름날 쨍쨍 내리쬐는 햇볕도 가려주고 공기를 맑게 해주는 가로수는 있어야 한다. 미국이나 서구 일본 같은 나라의 중소대도시를 보면 거리마다 가로수가 심어져 있어 부러웠다. 우리 스스로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고 오염된 공기의 정화를 스스로 배척하는 꼴이다. 건축물이나 시설물 고목나무 등은 철거나 폐기하기 전에 심도 있는 협의나 토론 등을 거쳐야 할 것이다. 5~60년 된 건물을 철거하는 데는 1~2일 걸리고 백년 된 나무를 베는 데는 5분도 안 걸린다. 다시 만들 수도 없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거와 같다. 그래서 철거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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