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56]

남자가 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절절한 정을 담아 시상으로 담기도 했다. 시인 자신의 섬세함일 것이다. 여자의 마음은 섬세하여 작은 것도 신중하게 조그마한 것도 생각을 깊이 하는 수가 많다. 남편이 먼 지방에 있었던 모양이다. 공직에 있었던지 귀양을 가 있을 수 있음을 가정하는 여자의 규정閨情 한 마당을 담아 놓았다. 아직까지도 보내지 못한 겨울옷을 생각하면서, 밤늦도록 마구 다듬이질만 재촉하고 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閨情(규정) / 이력 김극검
아직도 못 보내는 겨울 옷 생각하며
한 밤에 밤늦도록 다듬이질 재촉인데
등불에 눈물 마르고 마음마저 태우네.
未授三冬服      空催半夜砧
미수삼동복     공최반야침
銀釭還似妾      漏盡却燒心
은강환사첩     누진각소심

눈물은 다 마르고 마음마저 애만 태우고 있다오(閨情)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가는 이력(履歷) 김극검(金克儉:1439~1499)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아직까지도 보내지 못한 겨울옷을 생각해 보면서 / 밤늦도록 마구 다듬이질만 재촉하고 있구나 // 타고 있는 저 등불은 내 마음과 같아서인지 / 눈물은 다 마르고 마음마저 애를 태우고 있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아내의 마음 / 아낙의 깊은 정]으로 번역된다. 남성이 여성의 입장으로 돌아가 시상을 일으켰던 경우는 많았다. 한시뿐만 아니라 삼국과 고려를 거치는 동안에 잉태된 가사와 시조들도 그런 작품이 많았다. 임을 그리는 정, 임을 보내는 정으로 범벅이 된 정한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그 몸부림은 통렬痛烈할 수밖에 없다. 조선 여심의 규정 또한 예외가 아니다.

추운 겨울에 옷을 보내지 못한 시인은 밤늦도록 다듬이질하면서 가슴 저미는 시상 한 줌을 품에 안는다. 아직도 보내지 못한 겨울옷을 생각하면서, 밤늦도록 다듬이질만 재촉한다는 시적 선경을 그려냈다. 다듬이질하는 행위 하나만으로 겨울옷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규정의 아픔을 감내하지 아니할 수 없었으려니.

화자가 애태우는 후정은 타는 등불에 담아 마르지 않는 눈물을 시적인 가슴에 담아내고 만다. 타고 있는 저 등불은 내 마음과 같아서, 눈물은 다 마르고 마음마저 태우고 있다는 시정詩情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규정을 알고 있는 대상자는 암만해도 촛불밖에 없고, 그래서 다듬이질로 그 앙갚음을 했을 지도 모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못 보냈던 겨울옷을 다듬이질 재촉하네. 저 등불 내 마음 같아 눈물 말라 애태우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괴애(乖崖) 김극검(金克儉:1439∼1499)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459년(세조 5) 예문관 검열과 대교를 지내고, 1466년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발영시에 3등하였다. 1469년 세조가 양성지 등에게 명해 연소한 문신을 육문으로 나누어 배정할 때 성현·유순 등과 함께 시학문에 선발되었다.

【한자와 어구】
未授: 아직도 보내지 못했다. 三冬服: 삼동의 겨울 옷. 추위에 입을 옷. 空催: 공연히 바쁘다. 半夜砧: 야밤에도 다듬이질을 하다. // 銀釭: 타는 등잔. 還: 도리어. 似妾: 첩의 마음. 곧 나의 마음. 漏盡: 눈물이 다 마르다. 却: 도리어. 燒心: 마음을 태우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