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재홍일본인 가족으로 이뤄진 홍천군다문화가족 문화탐방 해설을 위해 동행한 적이 있다. 무궁화가 만발한 늦여름 홍천미술관 앞에서 차량 두 대로 나눠 탄 필자와 일행이 서면 모곡리 한서 남궁억 선생의 기념관과 그 일대를 돌아보는 코스였다.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인데도 무궁화는 활짝 웃으면서 우리를 맞이했다. 

필자의 경우 홍천관내 문화탐방을 수차례 해봤지만 이번처럼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한서 남궁억 선생은 독립운동가고 탐방객은 일본인들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36년간이나 강제 점령했던 장본인의 나라이고 오늘 탐방객은 그 나라 백성으로 우리나라에 시집와 사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먼저 해설을 하기 전에 “여러분은 현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 나라가 조국이고 부모님이 살고 계시고 여러분이 태어나 자라난 일본은 고국으로서 미묘한 감정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 탐방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분이고 특히 무궁화를 보급해 애국심을 키운 어르신에 대한 기념관인 만큼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먼저 무궁화에 대해 현재 모곡교회 목사이고 한서기념관 관장인 현재호 목사님의 인사말을 곁들인 해설이 있었다. 한서 선생은 서울 종로 태생으로 말년에 이곳으로 낙향했다. 구한말 대한제국 시절에 혼란한 정국을 바로잡기 위해 교육과 언론(황성신문) 정치 등에 참여한 애국자이시다. 

고종 황제로부터 충북 괴산군수와 양양군수 등을 임명받고 국민교육에 앞장섰으며 종교(기독교)를 통해서도 한국을 개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영어를 잘 해서 고종 황제의 영어통역관으로도 있었다.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 총독부에 토목국장으로 잠시 있었으나 그것은 한성(경성 지금은 서울)의 도시계획을 위한 공직자로서 일한 것이지 친일행적과는 무관한 처신으로 보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가 일본한테 강제 점령됐던 시기가  35년 8개월이지만 이미 그 전에 10여 년 이상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압박을 받아왔던 것이다. 결국 약 50여 년 동안 일본의 사실상의 지배를 받은 셈이다. 고로 그 시대에 태어난 한국인은 어쩔 수 없이 일본 정치 경제 문화를 안 받을 수 없는 처지의 위치에 있었다. 이 시기에 태어나서 똑똑하고 배운 자를 모두 친일이라고 매도한다면 한민족의 역사는 50여 년 동안 공백으로 있어야 한다. 결국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긴 것인데 역사마저 멈추면 되겠는가? 

한서기념관에는 한서의 행적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다. 특히 태어나서부터 서거할 때까지의 일대기는 필자도 미처 몰랐던 부분이 많이 있었다. 조금 아쉬운 것은 모든 책자와 서류 등이 한문으로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고 한글은 일부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품으로는 달랑 돋보기 하나뿐이다. 한서 선생은 문필가로서도 대단했다. 찬송가를 직접 작사 작곡 했고 무궁화도 전국에 보급했다.

한서의 행적에서 특이한 것은 일제의 강압에 대해 무저항국민운동이다. 마치 인도의 간디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쟁취를 위해서 한 것처럼 한서도 지켜야 할 일은 지키면서 순리적으로 이성과 감성을 곁들여 일본인을 설득하고 감격하게 해서 우리의 목적(독립)을 달성코자 힘쓴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도 하루 빨리 교육을 통해 배워서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정신을 가르쳤다. 탐방객 일행은 기념관과 모곡교회 무궁화동산을 두루 돌아보고 하루의 일정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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