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지난 호에서는 주로 작고한 배우들에 대한 얘기를 썼다. 필자의 주관적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누렸던 배우들에 대한 얘기였다. 이번에는 대중가요의 주인공들인 가수들의 얘기를 해보자. 우선 가요계의 거두 고복수가 있다. 그는 경남 진주 태생으로 “타향살이”로 유명하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의 남인수도 있고 현인도 있다. 현인은 “신라의 달밤”과 “굳세어라 금순아” “인도의 향불” 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으며 무대의 신사란 별명도 붙었다. 

“나는 웃었네”의 손인호도 있고 계수남도 있었다. “번지 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의 백년설도 유명하다. 그의 부인 심연옥도 가수다. “울고 넘는 박달재”의 박재홍 반야월도 있었다. 반야월은 작곡가로도 유명했다. 몇 년 전까지도 가요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남백송도 작고했다. 원방현 박경원 모두 보이질 않는다.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최희준도 지난해에 세상을 떴다. 그는 “진고개 신사” “월급봉투” “하숙생” 등 많은 히트곡이 있다. 특히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도 작고했다. 

젊은 날에 세상을 뜨면서도 히트곡을 남긴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차중락이 있고 특히 29세에 세상을 뜬 배호야 말로 아까운 가수인데 일찍 갔다. 그가 남긴 노래 수백 곡은 모두 히트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개 낀 장충단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외 수십 곡은 지금도 트로트의 대명사로 여러 가수들에 의해 불리고 있다. 

작고는 안했지만 나훈아와 조용필도 있다. 이 두 사람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가 몇 년 만에 한 번씩 대형 콘서트를 열어 팬들을 열광시킨다. 특히 나훈아는 요즘도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는 남진과 라이벌로 유명했고 배우 김지미와의 스캔들로도 유명세를 탔다.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유명했다. 이외에도 나이는 많으나 열심히 현역으로 뛰고 있는 가수로 남일해 송해 안다성 김용만 진박남 김상진 등은 TV를 통해 자주 보고 있는데 팬들을 위해 건투하기를 빈다. 특히 안다성과 송해는 아흔이 넘은 노익장들이다. 

여자 가수로는 먼저 황금심이 있다. 그는 “홍콩아가씨”로 유명했고 작고한지 몇 년 안 된다. “처녀뱃사공”의 최숙자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도 갔다. 백설희는 “딸 칠형제”가 히트했고 심연옥(생존 미국 이민)의 “한강” “나 하나의 사랑”의 송민도 역시 꽤나 유명했다. “호반의 벤치”는 권혜경의 히트곡이다. “늦기 전에”의 김추자도 은퇴하고 안 보인다. 남자중창단 쟈니부라더스는 “빨간 마후라”로 유명했다. 

청순한 가수 김인순이 교통사고로 작고했고 그 대신 인순이가 떴다. 금방울은방울자매와 쌍둥이 자매로 7~80년대 인기를 끌던 나비소녀도 갔다. 박재란은 현역으로 뛰고 있고 “노란샤쓰의 사나이” 한명숙은 와병 중이다. 조미미도 갔다. 그는 “서귀포를 아시나요” “먼데서 오신 손님” “동창생” “흑산도아가씨” 등이 히트했다. 여자가수의 원조로 이애리수를 잊을 수 없고 “황포돛대”의 황정자도 갔다. 광복 직후 신카나리아도 노래를 잘 불렀다. “내 이름은 소녀”의 조애희는 요즘 TV에 몇 번 나왔다. 그의 남편은 KBS단원으로 정년퇴직했고 그의 아들이 현재 KBS악단장이다. 가족 셋이서 한 무대에 선 것을 봤는데 참 보기 좋았다. 

우리나라 여가수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두 거장이 있다. 바로 이미자와 패티김이다. 이미자는 아직 공식 은퇴는 안 했고 패티김은 공식 은퇴 후 두문불출이다. 이미자의 “열아홉 순정”과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은 국민가요가 됐고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역시 크게 히트한 노래다. 음악(노래)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서적으로 가장 즐거운 것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약이다. 즐거우나 괴로우나 우리 곁에는 가수들이 있어 노래를 불러주고 위로해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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