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특별히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모이면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보낸다. 그때 흔히들 하는 말이 “요즘 왜 사는지 모르겠어” 한다. 정말 사람들은 왜 살까? 세상살이 아등바등 대면서 말이다. 젊어서는 배워서 성공하려고 악착같이 일들을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살 의미가 많이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이 세상사 모든 게 다 그렇다. 이번 기고에서는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저세상으로 간 배우들 얘기를 좀 해보자. 

1950년 후반대 국내 영화계는 비교적 활발했다. 무성영화(광복 전)에서 녹음시대를 거쳐(배우의 대사를 성우들이 대신했다) 동시녹음으로 성우들의 일자리가 줄었다. 동시에 흑백영화에서 총천연색(칼라영화)으로 변화의 발전을 했다.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는  “성춘향” 으로 신상옥 감독에 최은희가 여자주인공이고 남자주인공은 김진규였다. 

그 후 홍성기 감독의 춘향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나왔지만 당시에는 두 번째로 김지미와 신영균 주연의 영화도 나왔다. 당시 최은희(작고)와 김지미(생존)는 여자 주인공 라이벌이었다. 마치 가수 나훈아와 남진과도 같았다. 광복 후 여자배우의 대선배는 복혜숙이고 그를 이은 배우가 황정순이다. 두 사람 다 인자한 한국형 어머니 역할을 잘했다. 

그들을 이어 받은 배우가 강부자(생존)와 고두심(생존)이다. 여기선 주로 작고한 배우들을 중심으로 한 얘기다. 연기파 중견여배우로 주증여 문정숙 엄앵란(생존) 문희(생존) 도금봉 나애심(가수 겸) 최지희 윤정희(생존) 등이 있고 미인배우로 남정임 김자옥 최진실 등 모두 한때 뭇 남성 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배우들이다. 이들 외에 은막을 거쳐 간 조연배우들도 무수히 있지만 생략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작고한 분들도 있고 인기가 좋을 때 스스로 은퇴해서 가정을 꾸민 분들도 있다. 

남자배우로는 50년대 후반에 영화의 붐을 타고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많이 나왔다. 특히 연기파 배우 김승호는  “마부” 라는 흑백영화에서 대종상을 수상했다. 그 후속이 최무룡과 김진규다. 둘 다 미남배우로 최무룡은 노래도 잘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여배우인 김지미와 재혼을 했다가 다시 또 이혼을 했다. 김진규는 “피아골”이란 흑백영화(지리산의 빨치산들을 소재로 한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탄 바 있다. 최무룡과 김진규 두 배우도 역시 그 당시 라이벌로 유명세를 탔다. 홍천 서석면 출신 박암이 있었다. 묵직한 연기로 신사 역할을 많이 했다. 

성격파 배우로 황해 주선태 이예순  박노식 허장강 등도 중견배우들로서 유명했다. 특히 코미디(희극배우)로 유명한 양훈과 양석천은 뚱뚱이와 홀쭉이라고 해서 대중의 인기를 누렸는데 양훈은 100kg의 거구고 양석천은  50kg도 안 되는 마른체구였다. 역시 배우와 코미디를 겸한 김희갑은 자유당 독재시절 임화수(영화사 운영 폭력배)에게 구타를 당해 갈비뼈가 3개나 나갔고 전치 6개월의 부상도 당해 그 당시 연예계에 화제가 됐었다.

배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신성일(작고)이 있다. 그는 역시 유명 여자배우인 엄앵란과 부부사이로 60~70년대 청춘배우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원래 성이 강 씨인 신성일은 영화를 접고 대구에서 강신성일의 이름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어 정치인 생활을 잠시 하다 재선에서 낙선된 후 와병으로 2019년에 타계했다. 그는  “맨발의 청춘” 에서 최고의 연기로 인기가 대단했다.

5~60년대 세계적으로는 수많은 배우들이 활약하고 은퇴했지만 필자에게 잊히지 않는 배우로 남자는 미국 국적의 게리쿠퍼이고 여자는 오스트리아 출생인 오드리헵번이다. 쿠퍼의 준수한 연기와 헵번의 청순함은 아마도 영화계에서는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특히 그들 주연의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와 함께 말이다. 무수히 떴다 사라진 은막의 별들에게 다시 한 번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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