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46]

공무원 생활이 타성에 젖어서 인지 ‘싹싹 비비는 형’이 있다. 윗선 말에 무조건 ‘예예’하는 형이다. 이런 인물은 진취성이나 창의성이 없다. 상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형이다. 무조건적인 상사 존경 형으로 관공서나 기업에 큰 보탬이 되지 못한다. 시적 상관자인 권정경이란 자도 그런 인물이었음이 시문 속에 은근하게 녹아 있어 보인다. 오랜 병으로 모처럼 한가함을 얻어, 공연히 녹음이 낮아졌다고만 탄식했었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寄權正卿(기권정경) / 보한재 신숙주
오래된 병을 안고 한가함 얻더니만
공연히 녹음 낮아 탄식을 하더니만
꾀꼬리 나를 보고서 슬프도록 울었네.
得閑因病久    空嘆綠陰低
득한인병구    공탄녹음저
黃鳥催人起    東園數日啼
황조최인기    동원수일제

꾀꼬리는 나를 보고 어서 일어나라 재촉하고(寄權正卿)로 제목을 붙여 본 오언절구다. 작자는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1417~1475)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오랜 병으로 모처럼 한가함을 얻어 / 공연히 녹음이 낮아졌다고만 탄식 했었네 // 꾀꼬리는 나를 보고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하고 / 동산에서 며칠 간 슬프게 엉엉 울고 있었다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권정경에게 주다]로 번역된다. 권정경의 본 이름은 권균(權鈞:1464∼1526)이란 사람이다. 연산군 때에 도승지 등을 역임하며 연산군을 잘 보필하여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던 인물이다. 50여년의 나이 차이지만 임금을 잘 받든 유유상종이란 면에서 뜻이 같았겠다. 시인을 ‘숙주나물’이란 표현이 상징하듯이,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표상으로 지목되어 폄하되고 있음을 볼 때…

시인은 병 때문에 한가함을 얻어 공연히 녹음이 낮아졌다고 탄식했다는 선경이란 달관達觀의 비유적인 시상을 이끌어 낸다. 오랫동안의 병으로 모처럼 한가함을 얻었는데 공연히 녹음이 낮아졌다는 기후 때문이라고 탄식했었다는 경험과 생각에서 오는 차이의 시상이다. 머리를 식히는 좋은 방법은 잠을 푹 잔다든지, 잡념 없이 사색의 경지에 드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을 게다.

화자는 이제는 꾀꼬리가 일어나라고 며칠간 슬프게 울었다는 엉뚱한 시적상관물을 끌어 들인다. 꾀꼬리는 나를 보고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하려고, 동산에서 며칠간 슬프게 울고 있었다고 했다. 꾀꼬리는 주위 사람들의 권고였을 것이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오랜 병에 한가로움 녹음 낮아 탄식했네. 황조 재촉 일어나라 엉엉 울고 있었다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희현당(希賢堂) 신숙주(申叔舟:1417∼1475)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킨 직후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세조 등극 후 대제학에 오르며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렸다. 단종복위의 거사를 일으켰던 성삼문 등 집현전 동료들을 척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자와 어구】
得閑: 한가함을 얻다. 因病久: 오랜 병으로 인하다. 병 때문에. 空嘆: 공연히 탄식하다. 綠陰: 녹음. 低: 낮아지다. // 黃鳥: 꾀꼬리. 催人: 사람을 재촉하다. ‘人’은 시인 자신을 뜻함. 起: 일어나다. 東園: 동산. 數日: 며칠 동안. 요즈음 며칠간. 啼: 엉엉 울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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