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금융기관 직원은 퇴직금이 일시불이다. 세금으로 임금을 받는 공무원(행정 군인 경찰 교육 등)들은 매월 받는 연금제도가 있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일시불과 분할로 목돈을 찾고 남은 것은 연금으로 매월 받는 방법도 있다. 

필자는 농협은행 출신으로 연금이 일시불이었다. 1997년 2월 퇴직과 더불어 일시불로 받은 퇴직금으로 건평 34평(방1개당 5평)짜리에 방 6개의 원룸을 지어 세를 주기로 했다. 당시(1998년도) 방 한 칸에 20만 원을 받기로 하고 방 6개가 다 나갔다. 

방세는 20만 원을 받되 난방 수도 전기 하수도 TV수신 시청료는 별도로 안 받고 집주인(임대자)이 모두 부담하는 조건으로 임대했다. 이유는 방이 작고(1인 거주용) 난방이 심야전기온돌로 시공해서 건축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방세가 원체 저렴한 까닭에 한번 입주 후 웬만하면 4~5년은 보통이고 공무원이나 학생의 경우는 2~3년 정도 입주해 있었다. 필자의 경우 전문 임대업자가 아니고 34평의 2층에 방을 꾸며 세를 줘 받은 임대료로 생활비 일부와 용돈을 집사람과 나눠 썼다.   

그러는 동안 20여 년에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이주를 했다. 그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몇 분들의 얘기를 해본다. 2013년 10월 광고전문지를 보고 왔다는 박 모 세입자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당당한 모습으로 입주를 원하는데 6개월 정도만 있겠다고 했다. 

우리는 최소한도 12개월 즉 1년은 거주하는 조건으로 방을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굳이 반년만 있고 더 있게 되면 그때 있겠다고 했다. 이삿짐은 달랑 가방 하나가 전부이고 식사는 매식을 하겠다고 한다. 필자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반년짜리 입주계약서를 쓰고 당장 그날부터 있기로 했다. 

며칠 있다가 입주자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수년 전 연평도에서 폭파된 우리 해군함정 천안함의 주임원사였다고 한다. 제대를 얼마 앞두고 천안함 사건이 나고 직접 그 배에 타고 있던 자로서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후 바로 제대를 하고 국가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알선해 부산의 모대학교 학군단에서 일을 했는데 사고 당일의 처참한 상황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잠도 잘 수 없고 우울증 증세로 사회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 후 직장에 사표를 내고 가족과 지인 등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무조건 홍천으로 오게 됐다는 사연이다. “그럼 박 주임상사께선 홍천으로 오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었나요?” 하고 묻자 그는 “제가 현직에 있을 때 홍천 출신 사병이 있었고 그의 부친 회갑 때 한번 와본 적이 있는데 그 사병 역시 그 해전에서 전사했지요” 했다.

발길 닿는 대로 오다보니 그 사병이 살던 홍천 동면 OO마을이 떠올라서 무작정 홍천으로 오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필자의 원룸에서 2개월을 살다가 부산에서 가족이 찾아와 다시 부산으로 갔다. 

원룸을 운영하다 보니 별의별 입주자들이 다 있었다. 50대 초반의 여자 입주자는 서울에서 사정이 있어 홍천으로 왔다며 청소회사에 다니는데 그의 딸이 국가대표 상비군 역도선수로 학교 때 딴 메달만 한 박스가 됐다. 저 많은 메달 보다 차라리 현금을 상금으로 줬다면 모녀가 더 요긴하게 썼을 텐데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독신으로 온 무속인도 있었고 과거 태권도 사범을 했는데 병이 나서 국가의 도움을 받는 입주자도 있었다. 귀촌해서 부모님은 시골에서 펜션을 운영하며 두 딸을 홍천여고에 다니게 해 두 명 다 대학에 입학시킨 자도 있었다. 집은 비록 작고 오래됐지만 입주자들 모두 편안하고 안락한 주거환경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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