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원시시대부터라고 한다. 음식을 익혀먹기 시작한 것도 불을 발견하고 부터다. 불의 용도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고 많다. 문명사회에서 불이 없으면 다시 원시시대로 되돌아가야 할 처지다. 음식의 조리는 물론이고 불을 이용해 어둠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방법도 인류의 조상들은 찾아냈다.

야외에서 황덕불을 피워놓고 마을 경사 때는 야밤에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실내에서는 고콜(방의 한 구석에 화덕을 쌓고 연통을 밖으로 뽑아내는 장치)에 관솔을 태워서 빛도 내고 난방도 겸했다. 이 고콜은 1950년대 말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 중 하나였다. 관솔은 죽은 소나무 뿌리를 캐낸 것으로 불을 붙이면 송진이 녹아나오면서 불이 잘 붙는다. 또 소나무 가지치기 후에 죽은 가지도 있다. 

여름에는 뜰이나 마당 옆에 넓적한 돌을 놓고 그 위에 관솔불을 밝혀 모기도 쫒고 불도 밝혔다. 일제강점기 이전 즉 구한말 전에는 꿀벌에서 꿀을 뜨고 그 찌꺼기로 밀랍초를 만들어 명절 때 참기름을 섞어 찰떡에 발라먹기도 하고 밀초를 만들어 심지를 박아 불을 밝히는데 썼다. 또 들기름이나 산초기름 아주까리기름 등도 사용했다.     

구한말에 일본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석유등 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등유가 원체 귀해서 등잔불로 시작해 호롱불(남포불이라고도 했다)을 사용했다. 필자의 경우도 등잔불을 초·중학교 때까지 쓴 기억이 생생하다. 

등잔도 처음에는 사기(백자)로 만들어 썼고 6.25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이 버린 깡통(통조림 통)을 이용해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개량등잔이었다. 재래식 등잔은 불을 켜는 데가 하나였으나 깡통으로 만든 등잔은 몸통은 하난데 불꽃심지대를 두 개로 만들어 개량형으로 밝기도 두세 배였다.

그 후 등잔이 사라지고 호롱불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호롱불의 원리는 등잔에 유리통을 씌워서 불의 밝기를 서너 배 높이는 방법이다. 심지 조절만 알맞게 잘하면 촛불보다도 더 밝은 빛을 냈다. 전등(전기)이 들어오기 직전까지 상점이나 야외 등에서는 이 호롱불을 이용해 어둠을 밝히는데 요긴하게 사용됐다. 

그 당시 석유는 배급제로 1950년대 말까지 전매제도에 의거 공급했다. 특히 호롱불은 관리를 잘해야 한다. 심지를 너무 높이면 그을음이 나고 너무 낮추면 불꽃이 약해 제 광을 내지 못한다. 알맞게 조절하고 유리는 수시로 맑은 물로 닦아줘야 한다.

당시 학생들은 앉은뱅이책상에서 등잔이나 호롱불 앞에서 책을 읽고 공부했다. 등잔이나 호롱불은 관리를 잘해야지 조금만 방심해서 건드리면 등잔은 심지가 빠지고 호롱불은 유리가 깨져서 못쓰게 된다. 또한 잘 때 끄지 않고 자면 화재의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서 대낮보다 밝은 방에서 문명의 이기를 최대로 누리는 세대들이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지금 얘기가 멀고 먼 시대 때 같지만 사실은 5~60여 년 전 얘기다. 

등잔불이나 호롱불 앞에서 밤새도록 책을 읽고 아침에 거울을 보면 콧구멍이 시커멓게 된 때도 있다. 모두가 아련한 옛 추억의 한 줄거리 들이다. 우리는 지금 과학문명의 최대 혜택을 누리고 산다. 우리네 부모님세대와 그 위 조상님들은 어둠을 헤쳐 나가는 지혜가 나름대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어두우면 어두운대로 밝으면 밝은 대로 처지에 맞게 생활을 취했다고 보면 되겠다. 등잔 밑에서도 길쌈을 하고 바느질해서 가족들의 의복을 만들 때 그 어머니들의 마음을 지금 사람들은 상상이라도 해봤을까? 바늘에 손이 찔리는 것은 다반사고 석유가 나오기 전 등잔 기름 장만하는 데는 남녀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선대에 빛을 얻기 위해 이런 일도 있었다는 것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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