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4-31]

자연적인 사물을 의인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백구를 흰 머리가 난 노인으로, 흰 구름을 외롭게 여행하는 나그네로 치환하는 경우다. 노송老松도 나이가 듬직한 어르신으로 치환하며 대화하는 모습도 우리는 종종 본다. 그는 분명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고 민중의 애환을 달래주었다. 그리고 정치적인 어두운 현실 보았다. 날이 저물어 눈서리가 골짜기를 다 메우고 있을 때, 우뚝하게 빼어난 저 모습을 자세히 보라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松山幽居(송산유거) / 설학재 정구
우리 집 문 앞의 노송 한 그루가
백년의 봄비에 긴 수염 용 기르고
눈서리 다 메울 때에 빼어난 모습보라.
蓬蓽門前一老松    百年春雨養髥龍
봉필문전일로송    백년춘우양염룡
暮天霜雪埋窮壑    看取亭亭特秀容
모천상설매궁학    간취정정특수용

백년의 봄비에 수염이 긴 용 한 마리를 길렀었구나(松山幽居)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1350~1418)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우리 집 문 앞의 노송 한 그루가 있는데 / 백년의 봄비에 수염이 긴 용을 길렀구나 // 날이 저물어 눈서리가 골짜기를 다 메우고 있을 때 / 우뚝하게 빼어난 저 모습을 자세히 보라]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노송의 한가롭게 삶]으로 번역된다. 겨울이 되어야만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단다. 이 시에 나오는 노송은 오랜 풍상에 줄기가 굽었다. 그 모습이 추하거나 흉하지 않고 감히 범접하지 못하도록 위용을 갖추어 마치 한 마리 용의 모습이 되었음의 시상이다.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는 성삼문의 시조 한 수처럼 간난艱難의 세월을 유혹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꼿꼿이 살아온 어르신처럼.

시인은 날이 저물어 가고 온 천지가 눈으로 덮였어도 홀로 푸른 노송은 힘들고 어려운 인고의 세월동안 절개를 지켜 스스로 위엄을 갖춘 어른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 집 문 앞의 노송 한 그루가 백년의 봄비에 수염이 긴 용을 길렀다는 시상의 주머니를 매만진다. 노송의 울퉁불퉁한 모습 속에서 백년을 살아온 용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화자는 우리 주변에도 항일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으로 평생을 변함없이 힘들게 살아 노송老松과 같은 기상을 간직한 원로元老들이 있음을 떠올린다. 저무는 날에 눈서리가 골짜기를 다 메울 때 우뚝하게 빼어난 모습을 보라라는 한 마디 절규가 떠오르는 웅장이 보인 기상이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집 문 앞의 노송 한 그루 백년 봄비 수염 긴 용, 눈서리 골짜기 메우고 빼어나는 저 모습만’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1350~1418)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1377년(우왕 3) 급제하여 전교시부령을 지내고, 1382년 김극공의 옥사에 연루, 유배되었다. 1392년 한성부우윤을 지내고 1394년(태조 3) 왕명으로 한리·조서·권홍·변혼 등과 함께 <법화경> 4부를 금니로 썼다.

【한자와 어구】
蓽蓬蓽: 가난한 사람의 집, 또는 자기 집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門前: 문 앞. 一老松: 한 그루 노송. 百年: 백년. 春雨: 봄비. 養髥龍: 수염이 긴 용. // 暮天: 저무는 날. 霜雪: 서리와 눈. 埋窮壑: 골짜기를 메우다. 看取: 취하여 보다. 亭亭 ; 우뚝 솟은 모양, 노인이 건강한 모습. 特秀容: 빼어난 모습.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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