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심사위원

요즘 취업시험 문제는 5지선다형 문제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4~5개 문항을 내고 거기서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고르는 것이다. 물론 1차는 그렇게 객관식으로 치르고 2차는 논술 3차는 면접 등으로 우수 인재를 뽑는다. 개인회사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 문제를 내지만 공기업이나 공무원 등은 공정한 시험을 위해 답이 확실한 선다형을 주로 취급한다.

1960~70년대는 종합형이었다. 사지선다형도 있고 괄호 넣기 줄긋기 단답형 OX등의 시험지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공무원인 경우(요즘 9급이나 7급) 시험과목이 다소 달랐으나 대부분 공통과목으로 영어 수학 국어 법제대의 경제대의 일반상식 농업개론 상업개론 등이고 채용기관에 따라 조금씩 과목이 달랐다.

코로나19 전염병이 잡히면 각종 시험(공무원 공공기관 회사 등)들이 봇물 터지듯 치러질 것이다. 취업준비생들은 이 기간에 집에서 시험공부를 열심히 해서 모두가 합격의 영광을 누리기 바란다. 196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필자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보습학원을 운영하면서 각종 시험을 봤으나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1960~67년까지 무려 7년 동안을 불안한 직업(보습학원 요즘 진학학원)을 갖고 있어 공무원이나 교사 쪽의 시험을 봤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물론 열심히 공부를 안 한 탓도 있었지만 자만심도 갖고 있었다. 계속 몇 번 떨어지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고 낙방의 원인을 찾아봤다. 먼저 수학과목에서 40점 이하로 과락을 받았다. 학교 때 수학을 배우기는 했으나 실전에서 늘 과락을 맞은 게 원인 중에 하나였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도 없어 고심 끝에 수학과목이 없는 시험쪽을 택했다. 

1967년 초 농협중앙회에서 강원도에서 근무할 직원 특채가 도별단위로 있었다. 다행이 수학이 없었다. 대신 농업과 부기(회계기초)가 있었지만 만만했다. 영어는 어차피 모든 응시생들이 비슷하니까 과락만 면하면 되고 평균 점수만 올리면 된다. 고득점 순위로 합격을 시키니 해볼 만 했다. 시험결과 영어 외엔 거의 만점에 가까웠다. 특히 일반상식 농업개론 법제개의 경제대의는 자신만만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홍천군지부에 필요한 인원이 3명인데 홍천군에 주소를 둔 자는 필자 혼자이고 춘천과 경기도에 주소를 둔 입사동기가 2명이었다. 경기도 출신 동기는 서울농대 축산과를 나오고 강원도청 축산과 6급(현재로 9급) 공무원으로 수의사 자격증 소지자이고 춘천 거주 동기는 홍천군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 당시 6급 직원이며 강원대 농업과 출신이었다. 농업고등학교 상과 출신은 필자뿐이었다.

그해 6월1일자로 발령을 받고 바로 현업에 투입돼서 퇴직할 때까지 31년간을 근무했다. 당시 동기 입사생은 중도에서 퇴직하고 경기 수원에 있는 대규모 목장의 수의사로 전직을 했고 또 한 동기는 1998년 홍천군지부장으로 퇴임 필자는 이보다 1년 앞서 97년 군청농협지점장으로 퇴임했다. 

당시 시험제도는 1차 필기 2차 면접 3차 적성도 등을 치렀다. 강원도에서는 1차로 30명을 합격시켰으나 직원이 부족해 추가로 6명을 더 합격시켰다고 한다. 농협 시험에 불합격했던 필자의 지인 몇은 그해에 바로 공무원과 준교사 등에 합격해 평생직장을 갖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경제가 한창 번창하던 때라 일자리 공채가 많았다. 자기만 열심히 하면 가능한 모두가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

직장에 따라 시험응시제한 제도도 있었다. 은행의 경우는 학업성적이 졸업생 중 10% 안에 들어야 응시하게끔 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개인정보나 프라이드방식(필기가 없고 면접만 보는 제도)은 없었다. 오직 필기시험 자체이고 면접은 이런저런 가정사나 취미 희망지 등을 묻고 사람의 됨됨이 즉 인성들을 많이 봤다.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