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4-08】

사대문 밖에 살던 노정승(老政丞)의 어느 날 저녁 한 때의 소묘 한 점을 그리고 있음을 알게 한다. 갈꽃의 그림도 그려보고 금 솥의 국도 끓이는 장면을 연상해 본다. 세심한 노 정승의 오후 한 때의 부산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낚싯대를 부여잡고 강태공의 뒤꽁무니를 따르고 있는 형국이란 시상의 멋이 은은하게 배어나온다. 곧바로 금 솥에 국을 끓이던 그 솜씨로 오히려 낚싯대를 잡고 저문 물가로 내려간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漢陽村莊(한양촌장) / 복재 한종유

잔잔한 호수에 가는 비 지나더니
한 소리 긴 피리는 갈꽃을 격했는데
금 솔에 국 끊이다가 물가로 내려가네.
十里平湖細雨過 一聲長笛隔蘆花
십리평호세우과 일성장적격로화
直將金鼎調羹手 還把漁竿下晩沙
직장금정조갱수 환파어간하만사

십 리 잔잔한 호수에 가는 비가 지나더니만(漢陽村莊) 번역해 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복재(復齋) 한종유(韓宗愈:1287~1354)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십 리 잔잔한 호수에 가는 비가 살며시 지나더니만 / 한 소리 긴 피리 소리가 갈꽃을 격했구나 // 곧바로 금 솥에 국을 끓이던 그 솜씨로 / 오히려 낚싯대를 잡고 저무는 물가로 내려가고 있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한양시골 농막에서]로 번역된다. 시제가 주는 장소는 요즈음으로 말하면 서울 변두리쯤으로 해석하는 편이 더욱 좋겠다. 아니면 4대문 밖인 수도권쯤이 아닌 듯싶다. 3대문 안을 ‘장안’이라고 했다면 한양시골은 분명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의 생활은 한가하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보이는 정도에서 그칠 수는 없다. 그렇게 한가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시인의 생활은 한가하고 여유가 있다. 잔잔하고 여유로운 시상의 주머니를 꽉 채우더니만 선경에 만족하지 아니할 수 없는 여유만만을 보낸다. 십 리 잔잔한 호수에 가는 비가 살며시 지나더니만, 여운을 남기는 한 소리 긴 피리 소리가 갈꽃을 격했었다는 시상을 이끌어냈다. 한 줄기 소나기가 지나고 나니 피리 소리가 났다는 밑그림은 시인도 무언가를 하겠다는 행동의 전단계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화자는 이제 출출했던 모양이다. 점심도 먹어야 되고, 누룩의 찌꺼기인 막걸리 한 사발도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곧바로 금 솥에 국을 끓이던 그 솜씨로 / 오히려 낚싯대를 잡고 저무는 물가로 내려가고 있다고 했다. 후정의 출출함이 돋보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십리 잔잔 가는 비에 피리소리 갈꽃 격고, 국 끓이던 그 솜씨로 저문 물가 내려가네’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복재(復齋) 한종유(韓宗愈:1287~1354)로 고려 말의 문신이다. 1304년(충렬왕 30) 과거에 급제하여 사한에 들어갔고 충숙왕 때 사관수찬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쳤던 것으로 알려진다. 내치와 대원 외교를 통하여 약화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힘썼으며, 시문에 뛰어났던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十里: 십리. 平湖: 잔잔한 호수. 細雨過: 가는 비가 지나다. 一聲長笛: 한 소리의 피리. 隔蘆花: 갈꽃을 격하다(멀리하다). // 直將: 곧바로 ~하려고 하다. 金鼎調羹手: 정승 노릇할 만한 솜씨라는 뜻. 還: 오히려. 把漁竿: 낚싯대를 잡다. 下晩沙: 물가로 내려오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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