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4-03】

시상이 우연한 기회에 불쑥 떠오르는 것처럼 시제도 우연히 떠오르면서 붙인 경우가 많다. 산을 보면서 산과 한바탕 대화하는 내용이란 시상이라면 이와 같은 시제를 붙일 수가 있고, 구름의 피곤한 여행을 생각했다면 외로움과 피곤에 쌓인 내용을 시제로 놓을 수가 있다. 시상과 시제를 놓는 것은 시인의 자유다. 서창엔 눈바람이 저리 차갑고 쓸쓸하기만 하여라, 홀로 등잔불을 대하고 보니 내 평생이 우습다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삽화 : 인당 박민서 화가 제공

偶書(우서) / 직재 최유청

늙도록 시 공부에 쉬지도 않았지만
안타까워 나의 일은 언제쯤 이루련지
서창에 눈비 차갑네, 내 평생이 우습네.
老閱詩書手不停 可憐事業竟何成
노열시서수불정 가련사업경하성
西窓風雪寒蕭索 獨對殘燈笑一生
서창풍설한소삭 독대잔등소일생

안타깝다, 내 일은 언제 이루어질지(偶書)로 제목을 붙여 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직재(直哉) 최유청(崔惟淸:1095∼117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늙도록 시 공부에 쉬지도 않고 열심히 했건만 / 안타깝다, 내 이 시 공부하는 일은 언제 이루어질지 // 서창엔 눈바람이 저리 차갑고 쓸쓸하기만 하여라 / 홀로 등잔불을 대하고 보니 내 평생이 우습구나]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우연히 글을 짓다]로 번역된다. 시를 지을 때 독실한 시상에 젖어 시지試紙를 빼곡하게 채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연과 사물을 보고 우연한 시상이 떠올라 짓는 경우도 많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떠올린 시상이 훨씬 멋진 착상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는 선현의 시심을 작품 속에서 늘 만나게 된다.

시인이 젊은 시절부터 독실한 시상에 빠져 많은 시를 남기고 있음을 생각할 때 선뜻 이해가 된다. 나이가 연만하여 늙도록 시 공부를 쉬지 않고 열심히 했었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자기 환상에 빠진다. 그리고 이어서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환상이었겠다. [내 일은 언제 이루어질지]라는 자기 처지의 비관이 그것이다. 미관말직부터 시작했던 벼슬이었음을 보면 시상에 얽힌 자기 한탄은 쉽게 이해하게 된다.

화자는 서사적인 선경에 젖어들더니만 후정을 빼곡하게 남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창에는 눈바람이 차갑게 불어 쓸쓸하다고 하면서 홀로 깜박이는 등잔불을 대하고 보니 내 평생이 우습다는 자기 신세의 비관을 털어놓고 만다. 변하는 마음을 부여안은 인생사를 알게 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시 공부 열심이나 이뤄지기 어렵다네. 서창 바람 차가워라 내 평생이 우습구나’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2권 1부 外 참조] 최유청(崔惟淸:1095~1174)으로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132년(인종 10) 예부원외랑으로 진주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어사중승·전중소감을 거쳐 1142년 간의대부를 지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어 호부시랑에 제수되었고, 동북면병마부사·승선을 역임했다.

【한자와 어구】
老: 늙도록. 閱詩書: 시서 공부를 하다. 手不停: 손이 멈추지 않다. 可憐: 안타깝다. 事業: 사업, 공부하는 이 일. 竟何成: 마침내 어찌 이루겠는가. // 西窓: 서쪽 창. 風雪: 바람과 눈. 寒蕭索: 차갑고 쓸쓸하다. 獨: 홀로. 對殘燈: 등잔불을 대하다. 笑一生: 일생이 우습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저작권자 © 홍천뉴스 / 홍천신문 홍천지역대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