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전 홍천예총 회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지난달 28일 홍천군청 앞 잔디광장에서 독립선언서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홍천원로회(회장 박재민)가 주최주관한 이번 제막식에는 원로회원 18명과 허필홍 홍천군수 김재근 군의장 등 백여 명이 참석해 제막식을 지켜봤다.

독립선언서는 지금부터 100년 전 일제강점기 때인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대한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선언한 날이다. 이로부터 우리나라는 독립국임을 선포하고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활발히 진행됐으며 일본정부는 3.1운동을 계기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꾼 계기가 됐다.

독립선언서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강제 통합되고 우리가 그들의 탄압에 민족 자체가 말살될 위기일 때 대한독립을 위해 국내 민족의 대표들이 모여 자주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내용이다. 당시 주도세력은 종교 3단체인 천도교와 개신교 불교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대표 33인이 대한독립만세를 주도한 일이다. 그 후 만세운동은 유림 농민 기생들까지도 합류했다.

홍천의 기념비는 홍천의 원로회원들이 수년 전부터 자금을 모금했다. 적게는 몇 십만 원에서부터 많게는 몇 백만 원까지 자발적으로 기금을 조성해 3천여만 원을 들여 만들었다. 이날 기념식은 박세구(79) 회원의 사회로 원로회원 중 최고령이신 김창묵(98, 동창만세운동기념회 회장) 회장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박재민 원로회 회장의 대회사 김동희(78) 사무국장의 경과보고로 진행됐으며 끝으로 홍봉기(86, 전 홍천군의회 의장) 회원의 만세삼창으로 제막식이 끝났다.  예전에 비해 일찍 찾아온 초봄 날씨에 참석자들은 숙연한 자세로 제막식을 지켜봤다.

이날은 또 어떤 날인가. 베트남에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간에 미북 핵 폐기 두 번째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회담은 결렬됐으며 두 정상은 담화문 없이 헤어졌다. 3차 회담도 기약이 없었다.

우리나라가 분단된 것은 열강의 농간이지만 결국 우리나라 자체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500년간 무를 무시하고 문을 중시했으며 성리학의 이념아래 나라의 국력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무인(무사)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힘(무력)을 가지고 국내를 통일하고 칼로써 정치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무기(소총)를 들여왔고 그것을 자체 대량생산해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나라다.

우리나라도 개방의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쇄국정책과 안이한 세계정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반면 일본은 세계 1차 대전에도 참여했고 2차 대전은 주역의 나라로서 대동아평화를 위한다는 목적 하에 한국 만주 중국 필리핀 미얀마 등을 침략해 손아귀에 넣었다. 미국을 상대로 하와이 공격을 시도했으나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무조건 항복한 나라다. 그 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다시 재기해 오늘날 세계의 강국으로 우뚝 선 나라다.

우리나라도 광복과 더불어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3.1만세운동 후 백여년간 특히 근대 50년간의 발전은 그야말로 기적이라 하겠다. 5천년 한국역사상 이렇게 풍요로웠던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이제 정치만 잘하면 동아시아의 강국으로서 우뚝 서겠지만 요즘 국내정치가 녹록치 않아 근심이 된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보아 주변국가와 잘 어울려야 한다. 남쪽에는 일본 서쪽은 중국 북쪽은 북한과 러시아가 있다. 사실 미국은 태평양 건너의 먼 나라다. 그러나 피로 나눈 혈맹의 동맹국이다. 이 4개 나라와 외교를 잘해서 전쟁 없는 평화가 지속돼야 한다. 100년 전 독립선언서 내용을 숙지하고 향후 100년을 어떻게 해야 한민족이 평화 속에 안전한 국가가 지속될지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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