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현재 홍천읍 희망리에 소재하고 있는 명동보육원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난 후 9.28수복 직후 부모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청소년 고아들을 동면 덕치리 수타사에서 보호하는 고아원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이남채 주지스님은 홍천읍내에서 부모를 잃었거나 고아에 못지않은 극빈자 애들을 수타사 경내 요사채와 빈 공간에 모아 잠을 재우고 식사를 제공했다.

전쟁이 끝날 때(휴전)쯤엔 130여 명이나 됐고 미취학 아동과 초·중·고등학생들이었다. 스님은 이들을 3년간이나 돌봤다. 이남채 스님이 떠난 후 박봉영 스님이 주지스님이 되어 역시 고아들을 돌봤다. 고아들 중에는 형제자매들도 있었고 홍천뿐만이 아니라 춘천이나 외지에서도 와 있었다. 

식사 때는 가관이었다. 큰 방에 죽 둘러앉아 대접이나 사발에 반찬은 한 가지가 일쑤였다. 특히 전쟁 중에는 양식이 없어(절에선  자급자족했음) 주로 미국에서 원조물자로 보내준 옥수수가루와 분말우유가 전부였다. 밥은 쌀이 일찌감치 떨어져 꽁보리밥에 반찬은 무말랭이나 콩장이 전부였다. 필자의 지인이 몇 있었는데 학교 도시락 반찬도 역시 콩장에 꽁보리밥이었다. 그 콩장이 맛있다고 김치나 고추장 하고 바꿔 먹은 적도 많았다.

절에서 보리쌀이 떨어졌을 때는 옥수수가루 죽에 마른 우유 덩어리를 약간 넣어 죽을 끓여 먹였는데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원생들과 늘 함께 먹는 스님이 가운데 앉고 원생들이 둘러앉아 식사(옥수수가루 죽)를 하려고 죽을 떴는데 그 속에 구더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걸 본 스님이 한참 있더니 그 구더기를 집어내고 죽을 먹기 시작했단다. 원생들도 처음엔 침만 삼키고 멀거니 있다가 스님이 먹자 일제히 죽을 먹기 시작했다. 죽은 순식간에 비워지고 식사는 그렇게 해서 끝이 났다. 

원생들은 1950년대 말 수타사를 떠나 동면 속초2리(현재 동면농협 벼 건조장 동쪽 인근)로 이주하면서 명동보육원이라 개칭했다. 목조 기와집으로 제법 크게 짓고 고아원 시설을 갖추고 초대 민간원장으로 허만훈(작고 당시 면의원과 도의장을 지냄) 씨가 맡았다. 건물은 군 소유로 군 하천부지에 짓고 하천을 개간했다. 여기에는 홍천군 주둔 국군 공병대가 많은 지원을 했다. 

쓸모없는 하천 만여 평은 옥토로 변했고 원생들이 직접 벼를 심어 자급을 했다. 그러나 정작 원생들은 쌀밥은 많이 못 먹고 쌀을 판 돈으로 보리쌀을 구입해 먹었다고 한다. 원생들은 늘 배가 고팠고 가족의 그리움 속에 살아야 했다. 

1970년경에 속초리 고아원을 매각하고 현 희망리로 보육원은 이주를 했고 경영자(원정)도 바뀌어 허만훈 원장의 장자가 원장을 하다가 그 분 또한 사망하자 그 가족이 이어 원장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자주 우리나라 고아들이 외국으로 입양을 가 성장해서 고국을 찾고 부모를 찾는다는 소식을 접한다. 대개 성공한 자들의 스토리다. 그러나 국내의 고아원 출신들도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훌륭히 자라서 성공한 자들이 많다. 명동보육원생들만 해도 그렇다. 

필자의 지인 중 서울 모 은행 검사부장이나 지점장을 한 자도 있고 청량리 역장으로 퇴직한 자도 있다. 그 외 목사 건설계통의 인테리어 최고 전문기사 교수 등등 나름대로 잘 자란 고아들이 참으로 많다. 그리고 그들은 늘 끈끈한 정으로 서로의 소식을 전한다. 특히 이들 중 50여 명은 당시 홍천성당(천주교)에서 ‘조필리퍼션’ 신부님의 지도로 견진축복을 받기도 했다. 우리지역의 유일한 민간보육원의 설립과정과 원생들에 대한 지난날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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