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둔 아버지다. 그것도 두 딸의 아버지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기 두렵다. 딸 때문에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사건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연애를 반대한다고, 결혼을 반대한다고, 살다가 헤어졌다고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까지 처참하게 살해당해야 하는 이 끔찍한 세상의 끝이 어딘지 불안하다. 

몇 주 전 지하주차장에서 이혼한 전처를 찾아 흉기로 마구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아버지를 엄벌에 처해 달라는 딸들의 청원 내용에 의하면 피해자인 어머니는 가정폭력으로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이혼하고 죽이겠다고 하는 협박에 전 남편을 피해 거처를 수없이 옮기며 피신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지만 결국 처참한 시신으로 남았다. 

지난 10월 24일 부산시 사하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네 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30대 초반의 남자가 자신의 연인과 그 연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사건과 달리 가해자가 목숨을 끊음으로 원인도 알 수 없게 됐다. 

지난 5월 17일 서울 명문대학에 재학 중이던 남학생이 같은 학과의 여학생과 1년간 교제하다가 헤어진 후 다시 만날 것을 요구하며 스토킹을 했으나 만나주지 않자 하숙집까지 쫓아가 목을 졸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가 발각되는 등 연인관계에서 살인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변한 것은 이제 뉴스 꺼리도 아닌 세상이 돼 버렸다. 

옛날에 딸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시대가 있었다. 딸아이를 낳으면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먹을 것이 있어도, 입을 것이 있어도 늘 아들이 먼저였다. 아들은 대를 이어준다는 이유와 늙었을 때 삶을 보장해 준다는 점이 아들 우선주의의 배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산업화를 거쳐 지식정보화시대에 들어서는 여권이 신장됐고 딸을 선호하는 시대로 급변했다.

자녀가 부모를 봉양하는 시대가 아닌 시대상황으로 바뀌면서 아들선호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딸이 키우는 과정에서 애교도 있고 성장해서도 아들보다 부모를 더 생각한다고 해서 딸을 낳기 위해 다산을 한다는 부모도 있으나 결국 아들이고 딸이나 부모의 노후에 대한 대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딸을 둔 가정에서는 딸을 보호하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을 입거나 장갑차를 구입하고 총기류로 무장을 해야 할 지경이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첨단과학의 장비 덕에 범인은 곧 잡히게 되고 원인도 밝혀진다. 범인은 심신미약자로 정신과 진료를 받은 과거가 있다는 등의 보도도 뒤따른다. 삶 자체가 불안한 세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사고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라는 것이다. 미래사회의 주인공들인 요즘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부정적인 측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엄습해 온다. 대부분 참을성이 없다. 욱하면 먼저 일을 저지르고 본다. 화가 나면 앞에 있는 사람이 부모나 형제자매 그리고 선생님이거나를 불문하고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먼저 하고 본다.

농경사회에서는 힘든 일을 하면서 인내심이 길러졌다. 체벌이나 기합을 받으면서 참을성이 형성됐다. 하지만 지식정보화시대에는 육체적으로 조금만 힘들면 기계를 이용하게 됐고 자녀를 하나 또는 아예 낳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오냐 오냐 귀하게 키우면서 인성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것이 큰 배경이라고 생각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범죄자들의 뉴스를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가까이 우리들 옆에 다가왔다. 곧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인성교육의 기본은 가정교육이다. 가정교육이 제대로 회복돼야 바른 인성을 함양할 수 있다. 

요즘 참을성이 없는 젊은이들의 행태가 딸을 둔 부모에게만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낳고 키워준 부모의 멱살을 잡거나 흉기로 찌르는 아들들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따라서 아들을 둔 부모라고 해서 마음 편한 것은 아니다. 귀하게 키우는 자녀들이 인성적으로 올곧게 성장하도록 학교와 국가는 물론 모든 부모님들이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영욱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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