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 [2-107]

세종 때 여러 새로운 제도를 시행했다. 집현전, 유교적 왕도정치 실현과 유교사상 실천, 국방강화, 민족문화 실천, 민생안정책을 들 수 있다. 특히 민생안정책에서는 의창제를 실시하여 빈민구제와 천민인재 등용 같은 제도를 정착시키려 했다. 교산 같이 머리가 트인 사람들은 이런 획기적인 조치에 큰 박수를 보냈으리라. 조창이 새로운 그림 이루어 놓은 것 아닌가 의심하니 / 대숲 사이 참새 한 쌍이 가을꽃에 앉았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義昌第晩詠(의창제만영) / 교산 허균
겹발의 해 은은하게 회랑은 구석구석
조창의 새 그림이 아닌가에 의심하고
대숲에 참새 한 쌍이 가을꽃에 앉았네.
重簾隱映日西斜 小院回廊曲曲遮
중렴은영일서사 소원회랑곡곡차
疑是趙昌新畵就 竹間雙雀坐秋花
의시조창신화취 죽간쌍작좌추화

조창이 새로운 그림 이루어 놓은 것 아닌가 의심하네(義昌第晩詠)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겹발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은은히 비치고 / 작은 집 회랑이 구석구석 가려있는데 // 조창이 새로운 그림 이루어 놓은 것 아닌가 의심하니 / 대숲 사이 참새 한 쌍이 가을꽃에 앉았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의창제의 늦저녁을 읊음]으로 번역된다. ‘의창’이란 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어려운 사람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추수하여 돌려받는 제도다. 흔히 빈민구제소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면 편하다. 이를 시행하는데 지방촌민의 의견도 폭넓게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좋은 제도가 행여 왜곡되지나 않았을까 의심하면서 다시 보인 시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인은 이런 좋은 제도를 머릿속 깊이 염두하며 시상으로 돌이켜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겹으로 된 발을 사이하여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것이 은은하게 비치는데 작은 집의 회랑回廊이 구석구석 가려져 있다고 했다. 발이 쳐져 있어서 해가 비치지만 내부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아야겠다. 의창제를 실시하기는 했겠지만 백성들의 구석구석까지 힘이 다 미치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다.

화자는 다른 곳으로 의심의 화살을 돌리는 모습을 갖춘다. 이것이 혹시 조창이 새로운 그림을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고 하면서 대숲 사이 참새 한 쌍이 가을꽃에 앉았다는 엉뚱한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음으로도 보여준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해 서쪽으로 기우니 집 회랑이 가려있네, 조창그림 의심하니 참새 한 쌍 앉았었네’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94년(선조 27) 26세에 정시문과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이 전한다.

【한자와 어구】
重簾: 겹발. 隱映: 은은하기 비치다. 日西斜: 해가 서쪽으로 기울다. 小院: 작은 집. 回廊: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지붕 달린 복도. 曲曲遮: 구석구석이 가렸다. // 疑是: 의심하건데 이것이. 趙昌: 중국 오대십국 시대 북송 화가. 新畵就: 새로 이루었다. 竹間: 대숲 사이. 雙雀: 참새 한 쌍. 坐秋花: 가을꽃에 앉다.

장희구 張喜久(문학박사 / 문학평론가·시조시인)
아호 : 瑞雲·黎明·友堂
한국문인협회 회원 /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전)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 국제교류연구소장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문학박사)
남부대학교·북경경무직업대학 교수 역임
조선대·서울교대·공주교대·광주교대 外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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