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식
시인, 홍천문화원 부원장, 국가기록원민간위원

벌초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조상의 묘에 풀을 깎아주는 일”이라고 나와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조상의 묘에 한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풀을 깎고 간단한 예를 올리고 집안 간의 소통도 하는 한 집안의 행사다.

필자의 경우는 선산이 동면 좌운리 개고개 밑 산자락에 30여기의 조상 묘가 있다. 이곳엔 부모님의 묘는 물론 먼저 간 집사람의 묘도 있다. 그 외 삼촌들의 묘와 12촌 이상 집안 조상님의 분묘들이 있다.

10여 년 전 필자의 대고조 할아버지(6대 이상) 묘는 종중회의를 거쳐 안 하기로 했다. 비석은 땅에 묻고 분묘는 자연 상태 그대로 두기로 하고 다만 벌초만 안 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종중의 뜻을 모아 몇 기를 묵혔다.

이렇게 하기로 의견을 모으기까지는 많은 의견들이 나왔다. 벌초를 계속 하자는 쪽과 묘를 파서 산에 뿌리자는 쪽 석조물(납골당)을 만들어서 영구보존하자는 쪽 등 의견이 다양했다. 결국은 있는 그대로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벌초만 안 하기로 종결했다.

그리고 10여 년이 흘렀다. 올해 다른 조상들 묘만 벌초하고 전에 묵혔던 곳을 둘러보니 완전히 산으로 변했다. 봉분은 가라앉고 그곳에 소나무와 떡갈나무 잡목들이 울창하게 들어섰다. 구 조상님들께는 도리가 아니지만 후손들을 위해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벌초는 원래 음력 7월 그믐날(30일) 이전에 해야 후손의 도리라고 한다. 처서가 지나고 나면 풀들의 새순이 덜 나오기 때문에 문중에서 날을 정해놓고 해마다 벌초를 한다. 그믐날 이전에 벌초를 해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 유래가 있다.

농경사회에서 우리나라는 고려 때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상의 묘를 매우 중요시했다. 그래서 장례문화도 발달됐고 유택의 명당자리도 귀히 여겼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는 유교에 바탕을 두고 효를 중시하는 제도로 특히 양반사회에서는 대단했다.

조선왕조 500여년 역사에도 당쟁이 극심했는데 장례문화도 그 당쟁에 끼친 영향을 무시하지 못한 적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은 전체 인구의 0.5%~1% 미만이었다고 한다. 그 외 중인이나 서민 천민들은 양반의 위세와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또한 국토의 대부분이 정부의 관리들(위정자들)이나 양반들의 소유로 중인 서민들은 그들의 토지를 소작하고 산림을 돌봐주거나 혹은 묘지기도 했다.

벌초 때가 되면 먼저 그들(양반이나 관리들의 조상 묘)의 것을 깎아준 후에야 내 조상 묘를 깎았다. 당시(지금도 일부 있음) 벌초답전이라고 해서 묘를 깎아주고 그 대가로 전답을 경작했고 때로는 시제를 지내주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내 조상보다 남의 조상 묘를 먼저 다 깎고 내 조상 묘를 깎자니 자연히 벌초를 늦게 하게 된다. 해서 음력 7월 그믐날을 넘어서 벌초를 하면 “상놈들이 벌초하네” 하는 웃지 못 할 얘기도 있었다.

요즘은 아무 날이나 문중에서 날을 받아 집안이 모여서 벌초를 한다. 필자만 해도 그렇다. 다만 음력 그믐은 넘지 않는 날을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일요일(공휴일)에 모여서 한다. 한 30여 명이 모인다. 이날은 아낙네와 애들도 다 모여서 오전 중에 벌초를 끝내고 중식을 하고 헤어진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친인척들도 많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비가 와도) 음력 그믐 이전 직전 일요일에 한다.

올해는 양력 9일(일요일)로 음력 30일과 일치했다. 일가들도 애경사나 있어야 모이는 관계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고 또 조상 묘 벌초도 깔끔히 하고 나니 마음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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